[야구는 구라다] 혼돈의 계절에 구로다 히로키가 전하는 메시지

조회수 2016. 11. 10. 13: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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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5일)이다. 분명히 게임이 없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야구장이 꽉 찼다. 히로시마 마쓰다 스타디움에 사람들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모두가 빨간 유니폼 차림이다. 행사 이름은 다름 아닌 ‘우승 보고회’였다. 우승? 우승이라니? 웃기는 일이다. 그들은 불과 며칠 전에 일본시리즈에서 패했다. 오타니 쇼헤이의 니혼햄 파이터스에게 2승 4패로 KO됐다.

물론 그런 전통은 있다. 센트럴리그 1위만 돼도 ‘일본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오전에는 시내 거리에서 대대적인 카 퍼레이드까지 벌였다. 무려 31만명의 시민들이 동참했다. 43년만의 일이란다.

우승 보고회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장내 아나운서가 누군가를 호출한다. 내야에 도열했던 선수들 중 한 명이 나왔다. 등번호 15번이었다. 그가 마이크를 잡고 관중들을 향해 씩씩하게 인사한다. “20년간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세계 최고의 카프 팬들 앞에서 마지막을 맞게 됐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동료들은 그의 등번호 숫자만큼 헹가래를 쳐줬다. 그리고는 한줄로 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일일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며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다.

끝내 혼자 남은 마운드. 그는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 숙여, 얼굴을 깊이 묻었다. 간간히 양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숨 막히는 정지 동작은 33초간이나 계속 됐다. 관중석 여기저기서 훌쩍임이 들렸다. 3만 810명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마지막 마운드에서 무릎을 꿇은 구로다. 33초간 머물며 눈물을 보였다.     유튜브 화면

세리머니가 끝난 뒤 기자회견장이었다. 당시 심경을 물었다. 또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1분간이었다. 간간이 참을 수 없는 울먹임이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은퇴 선언 때도, 일본시리즈 패전 때도 보이지 않던 눈물이었다. 간신히 추스린 그의 대답이었다. “그 마운드에서 스탠드를 바라보는 게 마지막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후회랄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감정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좌절감의 이유, ‘9이닝을 던질 수 없는 몸’ 

올해 24번이나 선발로 등판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두자리 승수(10승 8패)를 올렸다. 완투도 1차례 포함됐다. ERA도 3.09로 수준급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팀은 25년만의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3선발이었던 그의 헌신이 한 몫 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정도면 내년 걱정할 필요 없다. 겨울에 잘 쉬고, 열심히 준비하면 된다. 나이가 40대지만 1년 쯤이야 어떻게 되지 않겠나. 설사 몇 차례 선발 로테이션 거른다 하더라고 뭐랄 사람 있겠나. 웬만큼 하면 최소한 40억원 가까이 되는 거액이 고스란히 통장에 꽂힐 것이다.

그런데 이 개인사업자는 그걸 마다했다. 가장 중요한 게임을 앞두고 덜컥 폭탄 선언을 해버렸다. “이번 일본시리즈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은퇴하겠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말렸다. 동료들도 조금 더 같이 하자고 붙잡았다. 팬들의 절절한 애원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항상 완투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9이닝을 던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좌절감을 느꼈다. 이제는 떠날 때라는 결론이었다.”

지난 토요일 오전 카 퍼레이드 모습. 무려 31만명의 시민들이 환호했다.      유튜브 화면

사실 공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다. 멀쩡한 곳이 별로 없었다. 오른쪽 팔꿈치와 허리에 늘 통증을 달고 살았다. LA 다저스 시절 타구에 맞은 머리도 문제였다(구급차에 실려나갔다). 그 후로 시도 때도 없는 두통에 시달렸다. 머리와 목 주변이 뻣뻣해지는 증상도 생겼다.

늘 경기장에 가장 먼저 출근해야 했다. 맛사지를 받기 위해서다. 최소한 2시간은 기본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힘들었다. 정상적으로 공을 던질 수 있는 상태가 안됐다. 주사도 달고 살았다. 진통/소염을 하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웠다. 맞는 횟수도 늘어났다. 나이를 먹으며 회복되는 속도도 느려졌다.

그가 느낀 좌절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의 철저한 경기 준비는 유명하다. 다저스 시절 커쇼조차 깊은 감명을 받아 본받겠다고 따라할 정도였다(아직도 커쇼의 복잡한 경기 전 루틴은 구로다의 영향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그 기본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만한 공을 던지기 위한 몸 만들기가 안된다는 뜻이다. 

늘 돈보다 우선하는 가치  

2년 전이다. 양키스는 그에게 1800만 달러(약 200억원)의 연장 계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마다했다. 1/5 밖에 안되는 액수에 복귀를 택했다. “33살에 미국으로 왔다. 분신과도 같던 붉은 헬멧(히로시마 선수들을 부르는 별명이기도 하다)을 내려놓고 다저스의 푸른 모자를 썼다. 그 때 나는 스스로 굳게 약속했다. 미국에서 성공한 뒤 반드시 히로시마로 돌아가겠다.”

누구나 다 마지막은 친정에서 장식하고 싶다. 그 따뜻한 품이 그리운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의 다짐은 달랐다. 단순한 복귀가 아니었다. 외국 생활에 지쳐서, 선수생활 마무리는 훈훈하게…. 따위의 감성적인 접근이 아니다. 스스로 정한 명확한 기준에 따랐다. ‘던질 힘이 남아 있을 때’라는 엄격한 전제였다. 그래서 ‘1800만 달러의 가치가 있을 때’가 그 시점이 됐다.

“히로시마와 계약한 연봉은 메이저리그에서 제시한 것에 비하면 매우 적은 돈이다. 그러나 시민구단의 예산을 생각하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고 싶다는 열망은 어떤 돈과도 바꿀 수 없었다.” 카프 팬들은 그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7년간이나 등번호 ‘15번’은 항상 비워져 있었다.

 히로시마 카프 홈 페이지

늘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돈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익히 알려진 10년 전 일화다. 히로시마에서 드디어 FA 자격을 얻었다. 가난한 꼴찌 구단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마지막 홈 경기 때였다. 팬들이 대형 플래카드에 편지를 내걸었다. ‘우리는 함께 싸웠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미래에 빛나는 그날까지.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 눈물이라도 되어주겠다. 카프의 에이스 구로다 히데키.’

그걸 보고 그의 마음은 흔들렸다. 결국 FA 권리를 포기했다. “내가 다른 유니폼을 입고, 히로시마에서, 카프 팬과 선수를 상대로 힘껏 공을 던진다는 건 아마도 정직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2007년 팬들이 내건 현수막 편지. 구로다는 결국 FA를 포기하고 평생 히로시마를 선언했다.  유튜브 화면

다년 계약을 마다하는 특이한 습성도 유명하다. 처음에 다저스 입단 때도 그랬다. 구단은 4년을 제시했지만, 그는 3년만 하자고 했다. “(미국 진출에) 설레는 마음 따위는 없다.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다. 그런데 이 괴로운 짓을 4년이나 하라고? 그런 행동은 짧을수록 좋다. 그래야 더 몰두할 수 있다.”

30중반을 넘어서는 그나마도 아예 1년짜리 계약서만 고집한다. 훨씬 더 받을 수 있는 다년 계약은 번번이 마다한다. “더 이상 내년을 위해서 야구할 나이는 아니다. 내가 왜 지금 야구를 하는 지 생각하면서 늘 완벽하게 태우고 싶다. 다년 계약을 하면 아무래도 2년째의 일이 머리를 지나친다. 여력을 남기며 시즌을 치르고 싶지는 않다. 팀에 리스크를 떠안기지 않고, 매년 결과로 내 자신의 가치를 어필해야 한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의 공포, 로테이션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두려움은 언제나 짊어지고 가야할 나의 몫이다.”

양키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히로시마 복귀를 결정했을 때였다.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돌아간다.”

꿈이라니. 모순 아닌가? 그런 거라면 양키스에서 이룰 것이 훨씬 더 많다. 가장 큰 마켓이고, 전세계인이 주목하는 명문 구단이다. 자신의 숙원인 가을 무대에 나가 챔피언 반지를 노려볼 가능성도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의 기준은 달랐다. “딸들이 야구를 아주 좋아한다. 내가 경기를 마치고 나면 늘 응원 메시지를 보내준다. 그때마다 책임감을 느낀다. 내 플레이 하나가 이 아이들의 정신과 생각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먼 훗날. 내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었으면 한다. 그것이 나의 꿈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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