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축구 올림픽 출전사, 리우에서 다시 한번 영광을

신명철 편집국장 2016. 1. 2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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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한국이 27일 새벽(한국 시간) 카타르 도하 자심 빈 하마드 경기장에서 열린 2016 AFC(아시아축구연맹) U-23 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개최국 카타르를 3-1로 꺾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권을 거머쥐었다. 리우 올림픽 예선을 겸하고 있는 이번 대회에서는 3위까지 올림픽 티켓을 준다. 한국 축구는 8회 연속, 통산 10회 올림픽 출전의 금자탑을 쌓았다. 올림픽 축구 종목 8회 연속 출전은 1900년 파리 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한국이 처음이다. 축구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를 빼고 리우 대회까지 26차례 올림픽에서 열린다.

한국 축구의 올림픽 출전사는 영광과 오욕이 점철돼 있다. 1948년 런던 대회부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한국 축구의 올림픽 출전 역사를 살펴본다.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 한국인 첫 올림피언은 김용식 선생이다. 경성축구단은 1930년대 중반 제국주의 일본이 주최한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조선인은 김용식 선생 뿐이다. 김용식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3-2로 이긴 스웨덴과 1회전, 0-8로 크게 진 우승국 이탈리아와 8강전 등 일본이 치른 두 차례 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해 풀타임을 뛰었다. 일본 축구 관계자들도 김용식 선생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조선인 선수들의 축구 실력을 증명할 자료가 있다. 일본이 1938년 제 3회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 대비해 1936년 11월 소집한 국가 대표팀 명단에 김용식과 이유형, 배종호, 박규정 등 4명의 조선인 선수가 들어 있었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 12조에 속한 일본이 중일전쟁의 여파로 기권하지 않았으면 한국과 월드컵의 인연은 보다 일찍 맺어졌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연인원 40여 명의 조선인 선수가 각종 국제 대회에 대비한 일본 축구 대표팀 훈련에 소집됐다. 우리 선수들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확실한 방증이다. 1945년 11월 뜻있는 체육인들의 노력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지 7년 만에 조선체육회가 재건됐다. 이때 조선축구협회를 비롯한 여러 경기 단체가 속속 결성됐다. 조선축구협회는 조선농구협회와 함께 일제 치하에서 조선체육회와 별도로 독립된 경기 단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체육인들의 발빠른 움직임에 힘입어 한국은 정부가 채 수립되기도 전인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했다.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나라는 NOC(국가올림픽위원회)를 구성하고 올림픽 종목 경기 단체가 5개 이상 국제경기연맹에 가맹하고 있어야 IOC의 승인을 받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재빠르게 국제경기연맹에 가입한 종목이 축구와 육상, 복싱, 역도, 농구, 사이클 등이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열린 축구와 농구, 필드하키 등 3개 구기 종목 가운데 우리나라가 축구와 농구에 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때는 자유 참가제였다. 아시아 나라 가운데 축구에는 한국과 중국, 아프가니스탄, 인도가 출전했다. 중국은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국체가 다른 나라다. 한국만 1회전에서 멕시코를 5-3으로 물리치고 8강에 올랐다. 아프가니스탄은 예선에서 룩셈부르크에 0-6으로 져 조기 탈락했고 인도는 프랑스에 1-2, 중국은 터키에 0-4로 져 8강에 합류하지 못했다. 한국은 8강전에서 우승국 스웨덴에 0-12로 크게 졌다. 일본은 전범국(戰犯國)으로 올림픽 출전이 금지돼 이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 무렵 국제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여정은 멀고도 험했다. 1948년 6월 21일 서울 종로에 있는 YMCA회관에 모인 축구 대표 선수들을 포함한 한국 선수단은 서울역까지 행진한 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배편으로 후쿠오카에 갔고 그곳에서 기차 편으로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배편으로 홍콩으로 간 뒤 홍콩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 방콕→캘커타(오늘날의 콜카타)→바그다드→아테네→로마→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에 도착했다. 축구 대표팀은 경유지인 홍콩에서 홍콩과 친선경기를 가져 5-1로 이겼는데 이 경기가 한국 축구사에 기록돼 있는 첫 A매치다.

이후 1952년 헬싱키, 1956년 멜버른, 1960년 로마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한국은 1964년 도쿄 대회 때 16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 섰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1-6, 브라질에 0-4,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에 0-10으로 크게 졌다. 이 무렵 한국 축구는 암흑기였다.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아시아 지역 예선(도쿄)에서는 일본과 3-3으로 비겼으나 필리핀을 15-0으로 꺾은 일본에 골 득실차에서 밀려 본선에 나서지 못했다. 본선에 턱걸이한 일본은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축구 종목 메달(동)을 땄다. 일본의 주전 공격수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대회 득점왕(7골)이 됐다.

서울에서 열린 1972년 뮌헨 대회 지역 예선에서는 대회 첫날 말레이시아가 일본을 3-0으로 잡으면서 파란의 조짐을 보이더니 한국마저 1-0으로 누르고 버마(오늘날의 미얀마), 이란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해 본선에 올랐다. 한국이 일방적으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으나 시에드 아마드에게 헤딩 슛 한 방을 얻어맞고 무너진 말레이시아와 경기는 아직도 중, 장년 축구 팬들의 기억에 생생하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예선에서는 이스라엘에 밀려 본선의 꿈을 접었다. 이스라엘은 이때까지만 해도 AFC(아시아축구연맹) 산하에 있었다. 1980년대 초반 AGF(아시아경기연맹)가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이 주도한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아시아 스포츠 무대를 떠나게 된다. 이후 이스라엘은 EOC(유럽올림픽위원회)와 UEFA(유럽축구연맹)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에는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한 미국 주도의 보이콧 움직임에 한국도 참여해 불참하게 되지만 축구는 이에 앞서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다시 한번 말레시아에 발목이 잡혀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예선에서는 직행 티켓을 받을 수 있는 조 1위 경쟁에서 치열한 골 공방전 끝에 사우디아라비아에 4-5로 졌고 막차를 탈 수 있는 아시아 3위 결정전에서는 이라크에 0-1로 패했다. 모래바람에 직격탄을 맞았다. 이 예선을 앞두고 감독의 지도 방식에 반기를 들고 태릉선수촌에서 5명의 주력 선수가 이탈한 사건은 축구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에서는 2무1패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는데 축구 팬들에게는 대회 결과보다 뒷날 한국 축구와 인연을 이어 가는 우승국인 옛 소련의 사령탑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이 더 기억날 듯하다. 비쇼베츠 감독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 지휘봉을 잡아 8강전에서 일본을 3-2로 잡는 등 선전했으나 4위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3무로 또다시 1라운드 통과에 실패한데 이어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는 ‘마지막 8분’을 버티지 못하고 8강의 꿈을 접었다. 한국은 조별 리그 C조에서 가나를 1-0으로 누른데 이어 멕시코와 0-0으로 비겨 8강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탈리아와 비기만해도 되는 경기에서 이태형의 동점 골을 지키지 못하고 1-2로 졌고 가나와 골 득실차는 같았으나 다득점에서 밀려 탈락했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는 1996년 애틀랜타 대회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2승(1패)을 올리고도 조별 리그를 통과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조별 리그 B조의 한국은 스페인에 0-3으로 졌으나 모로코와 칠레를 각각 1-0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모로코가 동네북(3패, 1득점 7실점)이 되면서 한국(-1)은 칠레(+4), 스페인(+3)에 골 득실차에서 뒤져 또다시 조별 리그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새벽에도 축구를 하는’그리스에서 열린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 한국은 56년 만에 올림픽 축구 종목 8강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조별 리그 A조의 한국은 개최국 그리스와 2-2로 비긴데 이어 호적수 멕시코를 1-0으로 잡아 8강의 발판을 마련했다.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는 말리와 골 공방전 끝에 3-3으로 비겨 1승2무, 조 2위를 차지했다. 준준결승에서 대회 준우승국 파라과이에 2-3으로 져 올림픽 메달의 꿈을 다음 기회로 미뤘다.

한국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한 일본은 1승2패, B조 꼴찌로 조기 탈락한 반면 이라크는 2승 1패, D조 1위로 8강에 올라 호주를 1-0으로 따돌린데 이어 준결승에서 파라과이에 1-3, 3위 결정전에서 이탈리아에 0-1로 져 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1956년 멜버른 대회 인도와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일본에 이어 아시아 나라로는 세 번째로 올림픽 축구 종목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라크 선수들은 귀국할 때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로부터 메달리스트 못지않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 한국은 조별 리그 D조에서 1승1무1패로 비교적 선전했으나 이탈리아(2승1무)와 카메룬(1승2무)에 밀려 8강에 오르지 못했다. 베이징 올림픽 축구 종목에는 개최국 중국을 비롯해 한국과 호주, 일본 등 AFC 4개 회원국이 출전했으나 모두 1라운드에서 떨어졌다.

한국은 2012년 런던 대회 3위 결정전에서 박주영과 구자철의 연속 골로 일본을 2-0으로 꺾고 대망의 동메달을 딴데 이어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 티켓을 거머쥐었다. 사전 경기로 개막식에 앞서 현지 시간 8월 3일 시작하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축구 종목 경기는 이제 6개월여 밖에 남지 않았다. 와일드카드 선정과 평가전, 조별 리그 상대 나라 경기력 파악 등 할 일이 많은 가운데 한국 축구 올림픽 출전사에 다시 한번 영광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사진] 8회 연속 올림픽에 진출한 신태용호 ⓒ 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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