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자 코리안드림]SK 에이스 켈리의 계속되는 도전

조회수 2017. 6. 16. 12:0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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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에 KBO에 진출, 팀의 기둥 투수로 성장한 켈리는 갈수록 좋은 피칭으로 다양한 미래의 가능성 높여

 작년에 31경기 선발로 나서 200이닝을 넘게 던지며 20번의 퀄리티 스타트를 한 머렐 켈리(29)는 9승에 그치며 불운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나 2017시즌 13번 등판에서 9번 QS로 더욱 호투하는 켈리는 이미 7승을 거두며 승운도 좋아졌습니다. 20대 중반에 마이너 최고 단계인 AAA의 좋은 성적을 뒤로 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켈리는 분명히 더욱 단단한 선발 투수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야구가 아닌 농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던 켈리의 야구 인생과 미래의 꿈을 들어봅니다.

평소 느긋한 성격의 켈리는 한국과 KBO에 잘 적응하면서 3년째인 올해 최고의 피칭을 하고 있습니다. 


 - 최근 연승가도다. 올해 더욱 좋은 피칭을 하고 있다고 보나?

▶ 음,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것 같다. 몇 경기 빅 이닝(대량 실점 이닝)을 허용하면서 망친 것이 안타깝기는 하다. 홈런을 3개 맞은 두산 전이나 대량 실점한 삼성 전 등이 그렇다. 그러나 지난 2년간 타자들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고, 그런 빅 이닝을 피하면서 피해를 줄여 가면 더욱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 새로운 구종이나 어떤 변화를 준 것이 있는지.

▶ 아마도 구종에 관해 가장 큰 변화는 커터일 것이다. 작년 후반기부터 던지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효과적은 구종은 아니었다. 좌타자의 몸쪽 공략에 어려움을 겪어서 커터가 유용한 구종인데 올해는 필요할 때 적절히 구사할 수 있게 됐고, 타자들도 나를 대하면 생각할 것이 많아지는 효과도 얻고 있다. 패스트볼과 체인지업 조합 외에 또 다른 구종을 대비해야 할 것이다. 커터가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 운도 많이 바뀐 것 같다. ‘켈-크라이’는 이제 사라진 건가? (웃음)

▶ (웃음) 그런 것 같다. 이젠 켈-크라이는 더 이상 없으면 좋겠다. 새롭게 돌아다니는 용어는 ‘켈리-스마일’로 알고 있다. (웃음) 운도 좀 바뀐 것 같고 울음보다는 미소가 훨씬 좋으니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


- 와이번스 라인업이 대단하다.

▶ 믿기 어려울 정도다. 상대 투수에게는 우리 라인업을 헤쳐 나가기가 정말 힘들 것이다. 워낙 파워가 대단하고 언제든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상대 투수는 경기 내내 예리해야만 한다. 볼넷이라도 내주면 다음 타자가 큰 것을 터뜨릴 수 있기 때문에 부담될 수밖에 없다. 최정부터 시작해 7,8번까지도 모두 홈런을 칠 수 있는 라인업이다. 우리는 언제든 빅 이닝을 만들어 경기에 다시 뛰어들 수 있다. 우리에게 완전히 뒤지는 경기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지난 등판 경기에서도 로맥이 큰 홈런을 치며 경기를 앞섰고 운 좋게 승리 투수가 될 수 있었다.


- 자신에 대해 들려 달라. 휴스턴(텍사스 주)에서 태어나 스캇츠데일(애리조나 주)에서 성장한 건가?

▶ 휴스턴에서 태어난 건 맞다. 스캇츠데일에서는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러나 어려서는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많이 이사를 다녔다. 호텔업에 종사하셔서 이직이 잦았고, 휴스턴, 오스틴, 필라델피아, 시카고, 그리고 마침내 애리조나로 이사했다. 14살 때까지 그렇게 이사를 다니다가 스캇츠데일에 정착했다.


- 아버지가 아주 부자라는 소문도 있든데. (웃음)

▶(웃음)정말 일을 열심히 하셨다. 가족을 위해 늘 일하셨고, 어려서 부족함 없이 자란 것에 정말 감사를 드린다. 스포츠도 그렇고 모든 부분에서 가족을 잘 부양해 주셨다. 아버지의 노력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 이렇게 여기 앉아 인터뷰를 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포시즌즈 호텔에서 25년간 일하셨다. 호텔 지배인으로 오래 일 하셨다. 열심히 일 하셔서 가족을 잘 부양하셨지만 우리가 원래 부유한 집안은 아니다. 5년 전쯤 은퇴하셨다. 지금 일흔이시니까 60대 중반까지 일을 하셨다.


- 형제, 남매는 있나? 혹시 야구를 한?

▶ 두 살 위의 형이 있다. 형도 야구를 했다. 2005년 휴스턴에 드래프트 됐는데 투수였고 나보다 공은 더 빨랐다. 그런데 프로에 가서 3년 후에 토미존 수술을 했고, 방출된 후 화이트삭스가 데려갔지만 척추 바이러스 증세로 1년간 고생하다가 건강은 회복됐지만 독립리그에서 1년 더 뛰다가 은퇴했다. 지금은 컴퓨터 엔지니어가 돼 로켓 제작 등의 일을 하고 있다.


- 본명이 케네스 메럴 켈리인데 케네스가 아니라 메럴이라는 중간 이름을 주로 쓴다.

▶ 그렇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그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케네스의 약칭 케니가 멋있어서 잠깐 돌아간 적은 있지만 이내 메럴로 불렸다. 케네스는 할아버지 이름에서 딴 것이다.


- 언제 처음 야구를 시작했는지 기억나나?

▶ 그건 모르겠다, 전혀. 아주 어려서부터 야구를 했다. 부모님이 모두 스포츠를 아주 좋아하셨고, 아버지도 투수셨다. 1960년대 휴스턴 콜트45(애스트로스의 전신)에 드래프트 되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친구들과 하던 밴드를 계속하기 위해 야구를 포기하셨다. 기타를 치셨다. 어쨌든 우리는 스포츠 패밀리였고 아주 어려서부터 형과 나는 야구뿐 아니라 농구, 축구 등을 늘 했다. 부모님이 늘 운동을 하게 하셨다.


-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된 건 언제인가?

▶ 좀 웃긴데, 아이들은 누구나 뒷마당에서 놀며 월드시리즈 7차전 9회말 투아웃을 꿈꾸는데 나도 그런 건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심각하게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고등학교 졸업반 때까지도 별로 없었다. 드래프트가 다가오고 내 이름이 오가기 전까지는. 사실 나는 늘 농구를 즐겼다.


- 농구? 프로 농구선수가 되기엔 키가 그렇게 크지 않은데. (188cm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185가 안 될 것 같습니다.)

▶ (크게 웃음) 나도 안다. 그래서 농구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고. 당신이 키 얘기를 하니까 참 재밌는 게, 고등학교 졸업하고 볼티모어가 나를 드래프트했고(37라운드), 스카우트가 집에 찾아와 협상 관련 이야기를 했었다. 부엌 식당에 앉아 얘기를 하는데 내가 야구보다는 농구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나를 위 아래로 보더니 키가 얼마냐고 물었다. 그래서 ‘거의 185cm 쯤 된다,’라고 했더니 ‘덩크를 못 하는 185cm 백인 소년이로군,’이라고 말했다. (웃음) 고교 졸업 후로는 농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 그런데 볼티모어와 계약하지 않고 2년제 야바파이 컬리지를 갔다.

▶ 고교 졸업 때보다는 주니어 컬리지에 가서 야구를 1년 더 하고 드래프트 되면 프로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 야구가 아주 부진했다. 그리고 드래프트도 되지 않았다. 그때가 내 야구 생애의 전환점이 된 것 같다.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고 정말 열심히 운동을 했다. 그저 잘하고 좋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장래를 생각하게 됐다.


- 고등학교 때나 컬리지 때 기록 등이 기억나나? 고등학교 마치고 드래프트 될 정도면 상당했을 텐데.

▶ 고등학교 때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37라운드였으니까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컬리지 때는 1학년 때 5승 무패였지만 평균자책점이 거의 5점대로 안 좋았다. 2학년 때는 아마도 내 야구 생애 중 최고였을 것 같다. 승패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평균자책점이 0.47이었다. 마지막 경기에서 5실점하며 0.61로 시즌을 마쳤다.


- 그런데 클리블랜드의 드래프트(22라운드)를 또 거절했다.

▶ 애리조나 주립대 같은 큰 야구 대학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통의 야구 명문대학에서 야구를 해보고 싶었다. 사실 결정은 아주 어려웠다. 클리블랜드에서 톱10 라운드의 계약금에 준하는 정말 좋은 조건을 제시했었다. 2년제 대학을 나온 야구 선수에겐 드문 액수였다.

 그러나 운명 같은 게 있나보다. 원래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과 애리조나 대학에서 야구 장학금을 제안해 두 학교를 방문했었다. (역시 유명한 1부리그 야구 대학들) 그런데 고등학교와 주니어 컬리지에서 함께 야구를 한 라일리 웰치라는 친구가 있었다. 다저스와 오클랜드에서 뛴 투수 봅 웰치씨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웰치씨가 애리조나 주립대의 팻 머피 감독과 아주 가까웠다. 아버지 때문에 머피 감독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또 애리조나 주립대 팬이던 라일리가 머피 감독에게 문자를 한 것이다. ‘머렐이 애리조나 대학에 진학하려고 하는데 머피 감독님이 이 친구를 영입하는 게 좋을 것’ 뭐 그런 문자였다고 했다.

기숙사에 있는데 라일리가 문자를 해 머피 감독이 연락을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농담이려니 생각하고 친구와 비디오 축구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전화가 왔다. 머피 감독님이 전화를 하셨고 일사천리로 애리조나 주립대 진학이 이루어졌다. 거기서 1년간 야구를 하고 탬파베이가 드래프트해(8라운드) 마침내 프로가 됐다.


- 기록을 보니 마이너리그에서 3년 반 만에 AAA까지 순조롭게 진출했다. 적응이나 부상 등 어려움은 없었나보다.

▶ 2010년에 프로를 시작해 2013년 후반기에 AAA에 갔다. 2011년에 약간 허리 통증이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지난 시즌 200이닝을 넘게 던지면 활약했지만 9승에 그친 켈리는 올 시즌 13경기에서 7승에 탈삼진 1위를 달리는 등 더욱 빼어난 피칭으로 SK 선발진을 이끌고 있습니다.


- 2013, 2014시즌 기록도 좋았다. 2014년 AAA 더램에서 9승4패에 2.76을 기록했고 당시 만 25세. 그런데 갑자기 한국행을 결정했다.

▶ 당시로서는 (한국행이)내게 최고의 기회였다. SK가 연락을 했을 때 나는 도미니칸 윈터리그에서 던지고 있었다. 그해 룰5 드래프트 대상이었는데 40인 로스터에 들지 못하면서 탬파베이의 의향은 분명해졌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에이전트가 전해준 탬파베이에서의 상황은 미래가 명확치 않았다. 프로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는데도 구단이 그런 식이라면 다른 선택이 필요했고, (메이저의) 다른 팀에서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당시 최고의 조건은 SK였다.


- 메이저리그가 여전히 마음에 있을 것 같다.

▶ 그건 분명히 그렇다. 한국에서 기회를 주었고 난 최선을 다해 그 기회를 잡았다. SK는 적응에 모든 것을 잘 도와줬고, 나의 한국행 결정은 결과적으로 최고였다. 물론, 2015시즌 탬파베이 투수진에 많은 부상이 있었고, 내가 그대로 있었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등의 생각으로 한국 첫 해엔 정신적으로 힘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게 기회를 준 것은 SK 와이번스였고, 경제적으로 가족을 도울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아주 감사하게 생각한다. 메이저리그 꿈을 버리진 않았지만 당시는 SK가 최고의 선택이었고, 지금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


- 동양권은 처음이라는데 적응에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 음, 사실 문화적인 면이나 야구 면에서는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첫 해에는 내가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있다는 점, ‘만약에’라는 가정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료들과 코칭스태프, 그리고 통역의 큰 도움 등으로 한국과 한국 야구에 적응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 마운드에서 철학이랄까,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

▶ 가능한 한 적은 투구수를 던지는 것. 효과적인 피칭을 하고 싶고, 볼넷이나 긴 볼카운트 싸움을 피하는 것. 기본적으로 어려운 싸움이 아니라 가급적 빨리 타자와 승부를 마무리 짓는 것이다. 올해는 다른 시즌보다 삼진을 많이 잡고 있지만 그건 아까도 얘기했듯 커터가 좋아진 때문인 것 같다. 사실 나는 삼진 애호가는 아니다. 삼진이 나오면 좋지만 그보다는 많은 땅볼을 끌어내려고 한다. 빨리 마운드에서 임무를 마무리하고 더그아웃에서 동료들이 홈런 치는 장면을 즐기는 게 좋다. (웃음)


- 삼진왕와 이닝왕 중 택일하라면?

▶ 삼진이 나쁠 건 없다. 팬들도 좋아하고 동료들도 좋아하고 스카우트도 좋아한다. 그렇지만 삼진은 내 경기 방식의 우선권은 전혀 아니다. 올해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삼진을 잡고 있지만 과거 내 기록을 보면 삼진 투수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6일 현재 89K로 차우찬과 탈삼진 공동 1위입니다.) 상대 팀에게 내가 공격적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지고 삼진도 잡아낸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은 좋지만, 선수 생활 내내 3구 이내로 타자를 처리한다는 것을 모토로 삼아왔다.

 작년에 이어 200이닝을 또 넘길 수 있다면 아주 좋겠다. 많은 이닝을 던진다는 것은 경기 후반까지 던졌다는 증명이 아닌가. 팀에 승리할 기회를 많이 주었다는 뜻도 되고. 그렇다고 그게 꼭 목표는 아니다. 200이닝을 넘기면 아주 좋겠지만 190이닝을 던져도 크게 상관은 없다. 팀이 승리하는 게 중요한 것이니까.


- 마운드에서 잘 안 풀릴 때, 예를 들어 투아웃 이후에 4연속 안타를 맞는다든지 그럴 때는 어떤 관점을 가지려고 하나?

▶ 아!...... 가능하면 생각을 줄이려고 한다.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말처럼 쉬운 건 절대 아니지만, 공 하나면 벗어날 수 있다고 스스로 계속 다짐한다. 내가 할 일이라곤 아주 좋은 공 하나를 던지면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상황이 휩쓸리고, 경쟁심이 있으니 화도 나고 하지만 좋은 투구로 땅볼 하나만 유도하면 더그아웃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 아까 잠깐 언급했지만 자신의 야구 미래에 무엇이 보이나? 에릭 테임즈 하면 떠오르는 건 없나? (웃음)

▶ (큰 웃음) 메이저리그에서 3년 계약이라면 나쁠 건 없다. 언제든지 받아들일 의사가 있다. (웃음) 메이저리그는 한 번도 이루지 못했지만 늘 나의 목표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매일 눈을 뜨고 야구장에 와서 더욱 발전한 선수가 되고 싶은 노력도 그 목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현재의 팀에서도 당연히 경쟁력 있는 투수가 돼야 한다. 내 야구 생애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한국에서의 야구 생활을 정말 즐겁게 하고 있으며, 오랜 기간 이곳에서 뛸 수 있다면 그것도 정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고향으로 돌아가 피칭을 할 기회가 온다면 한국에서의 기회보다 상황이 훨씬 좋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SK에서 내게 정말 잘 해주고 있고, 이제는 이곳이 집이라는 느낌으로 산다. 실제로 1년에 더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보내고, 동료들과의 생활이 가족들과의 생활보다 훨씬 많다. 여기서 오래 뛸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지만, 만약 좋은 기회가 온다면 고향으로 돌아가 던질 기회를 마다하진 않을 것이다.


- 남은 시즌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 꾸준히 나의 임무를 수행하고 싶다. 빅 이닝을 방지하는 것이 남은 시즌 가장 큰 목표가 될 것이다. 3,4점을 내주는 대신 1,2점으로 막을 수 있다면 그건 나쁘지 않다. 그럴수록 긴 이닝을 던질 수 있으니까.


- 평소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성격이 급한 편인가?

▶아니, 그렇진 않다. 공을 제대로 못 던질 때만 그렇다. (웃음) 웬만해서는 나를 화나게 만드는 건 없다. 느긋하고 태평한 성격이라 적응에도 그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던지지 못할 때만 정말 화가 난다.


- 팬들의 질문이다. 야구 외의 다른 삶은 어떤가? 결혼은 했는지.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정말 좋다. 아주 편하다. 8년째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는데 다음 달에 우리 강아지와 함께 한국에 올 것이다. 기다리고 있다. 한국 음식 중에 최고는 갈비라는 건 당연한 대답이고 그 외에 나는 국을 좋아한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다 좋아한다. 첫 해엔 매운 게 좀 힘들었지만 이젠 다 적응했다.


- 한국어는 잘하게 됐는지.

▶ 배우고 있다. 서서히 그렇지만 많이 배우고 있다. 상당히 어려운 언어다. 특히 동료들이 빠르게 말을 하면 언제 단어가 끝나고 시작되는지를 알기가 어렵다. 스페인어만 해도 단어가 끝나고 시작하는 걸 알아챌 수 있는데 한국어는 아직 그게 안 된다. 아직 문장으로 말할 정도는 아니다.


- 만나고 싶지 않은 타자는?

▶ (웃음) 보통 김태균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올해는 비교적 잘 상대하고 있다. 지난번 대기록도 우리가 멈추게 했고. 음....... KIA 타이거즈의 최(형우)라고 말하겠다. 벨런스도 좋고 스트라이크존을 잘 커버하고 힘도 좋다. 정말 좋은 타자다.


- SK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 흠, 약점은 알려줄 수가 없다. (웃음) 가장 큰 강점은 역시 파워다. 언제든 터질 수 있는 라인업이고 정말 무기가 많다. 경기 후반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강한 타선이다.


- SK는 플레이오프에 갈 것으로 보나?

▶그렇다. 우리 투수진이 계속 잘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계속 투수진이 잘하고 있고, 이정도 타선이라면 당연히 플레이오프에 갈 수 있다고 본다.


- 징크스나 습관, 미신 등이 있는지?

▶ 미신 등이 많지는 않지만 마운드에 올라갈 때 라인은 뛰어 넘어 간다든지 몇 가지는 있다. 미국에 있을 때는 등판 전날에 꼭 찾아가 먹는 멕시코 음식점이 있었다. 더그아웃에서 나와 마운드로 갈 때는 글러브를 오른손에 들고 가고, 워밍업 피칭을 마치면 1루수에게 공을 던지고 모자를 옆으로 쓰고 마운드를 돈 뒤 다시 모자를 바로 쓰고 공을 받는다. 투수들이 좀 특이하기는 하다. (웃음) 그리고 먼지를 집어 들고 나만의 의식을 한다. 그리고 손을 세 번 닦고 피칭을 시작한다.


- 인천에서 좋아하는 곳이 있나?

▶ 송도에 사는데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최근에 스쿠터를 구입했는데 헤드폰 끼고 센트럴 파크 라이드를 즐긴다. 공원들이 많아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 코리아는 켈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 정말 의미가 크다. SK 와이번스는 내게 선발 투수의 기회를 주었고, 그것이 내가 한국행을 결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코리아는 내 삶의 큰 부분이 됐고, 벌써 3년째이고 더 이어질 수도 있다. 내가 선발 투수로 자리를 잡은 곳이 한국이고, 경제적으로 내 가족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준 곳이기도 하다. 나의 삶에서 한국은 정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소중한 곳이다.


 만 25세에 한국에 온, 아마도 역대 외국인 선수 중 최연소였던 켈리는 이제 3년차에 와이번스의 에이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김광현이 부상에서 돌아오면 막강한 원-투 펀치로 위력을 더할 것이라는 기대로 걸게 합니다. 더욱 발전하고 있는 투수 켈리의 미래를 점치긴 쉽지 않지만 한국에서의 선수 생활과 삶을 즐겁게 열심히 보내고 있습니다. 일단 남은 시즌 그의 역할이 와이번스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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