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자 MLB리포트]GM의 대명사였던 빌리 빈 인생 두 번의 결정

조회수 2017. 6. 8. 07: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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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레드삭스의 파격 제안 거절 후 15년, 오클랜드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빌리 빈

 국내의 야구팬들도 대부분 ‘빌리 빈’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꼭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경제나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중에도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2003년의 그를 주제로 한 책 ‘머니 볼(Money Ball)’은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로 등장했습니다. 2011년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가난한 프로 야구단 오클랜드 에이스의 단장인 빌리 빈의 생애를 다룬 영화의 내용은 '1라운드에 뽑힌 유망주로 실패를 거듭하던 빈이 오클랜드 단장으로 어떻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지, 그가 하버드대 통계학과 출신 폴 데포디스타의 도움으로 고안한 새로운 선수 구성 방식이 어떻게 야구계에 영향을 끼쳤는지'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뉴욕 양키즈, 보스턴 레드삭스, LA 에인절스 등 거대 군단 사이에 끼여서 어떻게 오클랜드가 버텨내고 좋은 성적을 거뒀는지를 보여줬습니다. 빈의 역할을 맡은 브래드 피트는 2012년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한 영화제에 참석한 오클랜드 단장 빌리 빈(하늘색 타이)은 2000년대 MLB 최고의 단장으로 각광받았습니다. ⓒWikimedia Commons


 2017시즌은 빈이 오클랜드의 단장을 맡은 지 2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물론, 작년에 부사장으로 승격하기는 했고 오랫동안 부단장을 맡았던 데이빗 포스트가 단장에 오르기는 했지만 팀에서 빈의 역할은 여전합니다. MLB에서 같은 역할을 가장 오래 맡은 이가 베이 브리지 건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브라이언 사빈’이라는 점은 우연치곤 기연입니다. 사빈은 1996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단장을 맡아 빈보다 1년 더 팀을 이끌고 있습니다.


 1962년 3월 29일 플로리다 주 메이포트에서 태어난 윌리엄 라마 빈 3세는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에게 야구를 배운 빈은 고교 시절 야구, 농구, 풋볼 스타였습니다. 1980년 여름, 스탠포드 대학이 야구와 풋볼 장학금을 제시하며 그를 영입하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진학만 결정되면 풋볼 팀의 쿼터백을 맡길 심산이었습니다. 당시 2학년이던 존 엘웨이라는 쿼터백을 제치고 말입니다. 후에 엘웨이는 덴버 브롱코스의 전설적인 쿼터백이 됩니다.)

그러나 대학 대신 뉴욕 메츠의 1라운드 픽(23번, 대부분 1번 픽으로 인정했지만 스탠포드 대학 진학이 결정적이라고 본 다른 팀들이 그를 뽑지 않았습니다.)으로 프로에 진출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길을 겪으며 기대에 못 미칩니다. 건장한 체격에 금발 미남, 그리고 대형 타자로의 잠재력으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4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도 고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레벨에서도 2할5푼 이상을 치기 힘들었습니다.


 1984년 처음 빅리그에 올랐지만 메츠 유니폼을 입고 뛴 것은 고작 5경기.

다음해에는 또 마이너에서 시작이었습니다. 마이너와 빅리그를 오가다가 1986년 미네소타 트윈스로 트레이드됐고, 여전히 빅리그는 파트타임에 불과했습니다. 디트로이트로 옮겨서도 마찬가지였고, 1989년 오클랜드에서도 37경기를 뛴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1990년 스프링 캠프가 끝나고 다시 마이너리그로 배속되자 그는 당시 오클랜드 단장이던 앤디 앨더슨을 찾아갑니다. (빈의 빅리그 최종 기록은 한 시즌도 안 되는 총 148경기 2할1푼9리 3홈런 29타점이 전부였습니다.) 빈은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스카우트로 일하겠다고 자원했고, 3년 후 부단장으로 승격해 마이너리그 스카우트를 총 책임지는 고속 승진을 했습니다. 최고 선수의 잠재력은 피우지 못했지만, 팀 운영과 선수 스카우트에는 빼어난 능력을 과시했던 것입니다.

 

 앨더슨의 뒤를 이어 1997년 10월 오클랜드 단장에 오른 빌리 빈은 MLB에서 가장 가난한 팀 중의 하나인 오클랜드를 최고의 ‘저비용 고효율‘ 팀으로 끌어올립니다.

2000년부터 4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고, 단적인 예를 들어 2006시즌 오클랜드는 MLB 30팀 중에 팀 연봉이 24위였는데 리그 5위의 승률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2002시즌에는 100년 넘는 AL 역사상 최초로 정규 시즌 20연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약팀인 분명해 보이는데도 묘한 선수들의 구성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마법사 같은 인물로 떠올랐고, 베스트 셀러 책은 그의 신화에 진한 색체를 더했습니다. (그런데 빌리 빈의 세이버매트릭스 야구의 기본은 바로 앨더슨 전 단장부터 시작됐다는 증언이 유력한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1990년대 초 오클랜드 구단주가 바뀌고 재정 압박이 심해지면서 앨더슨 단장은 출루율에 기반을 둔 야수 선택의 틀을 만들었고, 빈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리 빈이라는 최고의 GM도 결국 이루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승은커녕 정규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둬도 포스트 시즌만 가면 맥을 쓰지 못하고 월드시리즈 진출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빈이 팀을 맡은 후 8번이나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을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첫 4번 연속 디비전 시리즈 패배로 곧바로 탈락하는 등 6번이나 디비전 시리즈에서 패해 조기 탈락했고, 2014년에는 와일드카드에서 바로 탈락했습니다. 2006년 모처럼 디비전 시리즈를 통과했지만 ALCS에서 디트로이트에 패해 월드시리즈 진출은 무산됐습니다. 빈이 팀을 맡기 훨씬 전인 1989년, 공교롭게도 빈의 현역 마지막 시즌이 오클랜드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 해였습니다.


1989년 마지막 선수 생활을 오클랜드에서 한 빈은 1990년 마이너에 배속되자 스카우트로 새로운 삶은 시작했습니다. ⓒWikimedia Commons


 빌리 빈의 야구 생애에서 월드시리즈 무관 외에도 아마도 두 번의 후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첫 번째는 스탠포드 대학을 포기하고 프로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는 ‘내 생애에서 유일하게 돈 때문에 결정을 내렸던 일’이라며 에둘러 아쉬운 선택의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는 12만5천 달러의 계약금을 받았는데 현재의 가치로는 36만 달러가 약간 넘는 정도라고 합니다.) 대학에 진학했다면 그의 생애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두 번째 큰 결정의 순간은 2003년 초에 있었습니다.

오클랜드를 맡고 불과 4년간 두각을 나타내자 보스턴 레드삭스의 당시 존 헨리 구단주가 빈을 초대합니다. 텅 빈 펜웨이 파크를 걸어 기자실로 올라가자 창밖으로 내리던 비를 바라보던 헨리 구단주는 빈에게 수표를 제시합니다. (한때 백지 수포라는 헛소문도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단장에게 정말 파격적인 5년 1250만 달러를 제안한 것입니다. 당시까지 MLB 사상 계약 총액과 연봉 모두 단장에게 최고액의 제시였고, 빈은 정말 깜짝 놀랐고 또 영광스러웠다고 늘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레드삭스 구단의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혼을 했지만 같은 지역에 살던 당시 12세이던 외동딸 케이시와 너무 멀어지고 싶지 않았고, 또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노부모님과도 너무 먼 곳으로 이주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돈 때문에 인생의 결정을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고 했습니다.


 15년 전 빌리 빈의 그 결정은 미국 야구사에 아마도 대단히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을 겁니다.

미래를, 혹은 다른 가정 하의 지난 역사를 알 수는 없으니 빌리 빈이 맡은 레드삭스가 어떤 방향으로 갔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빈의 거절로 새로운 인물은 찾은 레드삭스는 2004년 마침내 ‘밤비노의 저주’를 떨치고 1918년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스타 단장인 ‘쎄오 엡스타인’이 탄생합니다.

과연 가난한 구단을 잘 꾸려갔던 빈이 부자 구단인 레드삭스를 맡아 개인적으로 못 이룬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루며 밤비노의 저주를 깼을까요? 그건 이제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영원히 궁금한 질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보스턴 글러브지에서 빈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15년 전의 그 결정에 대한 질문이 주제였습니다. 자신의 거절과 보스턴의 성공, 그리고 오클랜드에서의 성공과 실패 등을 논한 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벌써 15년이 지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내가 얼마나 큰 제안을 거절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레드삭스와 엡스타인 칭찬 등 중략) ... 그러나 후회는 없다. 소중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오클랜드 구단을 잘 키워왔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딸이 성장하는 것을 늘 곁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27세의 처녀가 됐는데,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행복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빌리 빈은 오클랜드에서의 마지막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MB에서 가장 낡은 운동장에서 가장 적은 팀 운영비로 끌어가는 팀 중에 하나지만 구단주도 바뀌고, 운동장을 함께 쓰던 풋볼팀 레이더스도 떠났습니다. 산호세나 실리콘밸리로 팀 이사는 실패했지만, 프로농구팀 워리어스가 예정대로 떠나면  오클랜드 시에서 이제 유일한 프로 스포츠 팀으로 신축 구장의 희망은 더 커졌습니다. 새 운동장과 함께 1989년 이후 첫 월드시리즈 우승이 한때 GM의 대명사이던 빌리 빈의 마지막 도전입니다.


 과연 오클랜드의 새로운 전성기를 빈이 열어 제칠까요?



 이 기사는 minkiza.com, ESPN.com, MLB.com, BostonGlove, baseballreference.com, Wikipedia 등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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