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모의 Respect] 축구 선수의 어머니로 산다는 것

조회수 2017. 5. 18. 09: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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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선수 생활 시작, '맨 땅에 헤딩'한 유럽 무대 도전, 그리고 독일 상파울리에서 1군팀과 프로 계약까지. '축구판 동화' 같은 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는 한국의 축구인 박이영.
그의 첫 축구 인생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모두 지켜보고 지탱해준 그 어머니와의 만남.
한국의 한 '축구 선수 엄마'로서의 경험과 생각에 대한 이야기.
필리핀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해 많은 도전과 우여곡절을 거쳐 최근 독일 상파울리 1군팀과 계약을 맺은 박이영과 그의 어머니 맹기영 씨. 

"일반 학생들은 시험 보는 기간에만 시험이 있는데, 축구 선수는 매 주말마다 경기라는 이름의 시험을 봐야했어요. 또 늘 아들이 부상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해야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저는 늘 아들이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길 바랐어요. 그리고 제 아들이 많은 부담을 이겨낸 것 같아 기쁩니다."

축구 취재를 하다보면 축구 선수의 아버지와 소통하게 되거나, 축구 선수의 아버지를 통해 그 선수의 생각을 듣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또 때로는 그 아버지가 직접 전면에 나서 언론을 상대로 선수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일도 있다. 그것은 꼭 한국에만 국한 되는 일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축구 선수의 성장에 아버지들이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늘 한가지 아쉬움을 품고 있는 부분은, 분명히 선수들의 성장에 아버지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미치는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일이 좀처럼 없고, 그들의 공이 빛을 보는 일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기, 박이영이라는 아주 특별한 사연과 경력을 가진 한국의 축구인이 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필리핀으로 건너가 축구선수생활을 시작해 맨 땅에 헤딩하듯 유럽 무대에 도전해 포르투갈, 슬로바키아 리그 진출에 실패를 겪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기회를 잡은 독일의 상파울리라는 클럽에서 U-23팀 소속으로 2년간 뛰다가 최근 1군 팀과 계약을 맺으며 드디어 어엿한 유럽의 프로 선수가 됐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그렇게 우여곡절이 많은 축구 인생을 이어오는 모든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그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어린 나이에 축구를 시작한 아들이, 남들처럼 대학 축구부에도, K리그 클럽도 입단하지 못하고 필리핀에서 처음 축구 선수생활을 시작할 때의 마음과 필리핀을 떠나 유럽에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박이영의 어머니 맹기영 씨를 함부르크에서 만나 엄마로서 지켜본 박이영의 이야기 그리고 축구 선수의 어머니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 아들이 처음 '축구를 하고 싶다'고 했던 그 순간 

박이영의 어머니, 맹기영 씨에게 가장 먼저 건넨 질문은 아들의 축구가 시작된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지였다. 그녀는 그 당시의 상황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어요. 그 때가 아마 이영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였을 거에요. 그 때 마침 2002년 월드컵이 있었는데, 이영이랑 또 다른 친척들이랑 같이 거리응원을 나갔었어요. 그 때 이영이가 처음으로 '축구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보통 초등학교들이 4학년부터 축구부에 학생들을 받아줬었는데, 하필이면 이영이가 다니던 학교가 공사를 하면서 임시 폐교를 하게 됐어요. 그래서 축구부에 들어갈 수도 없게 됐죠. 그런데 그 때부터 이영이가 아주 확고하게 축구부가 없는 학교는 전학을 가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나 저희 집은 그 때 축구부가 있는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축구부가 있는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죠. 그때까진 그런 것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학부모님들에게 '아들이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데 축구부가 있는 학교가 어디있나요'라고 물어봐서 결국 꽤 먼 거리에 있지만 그래도 축구부가 있는 학교를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이영이가 4학년이 되기 전 겨울에 이영이 손을 잡고 그 학교에 찾아갔어요. 아직 그 학교로 전학을 가기도 전이었는데 무작정 축구부 감독님을 찾아간 거죠. 그래서 전학도 가기 전에 그 학교의 전지훈련도 따라가면서 결국에는 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습니다. 그렇게 이 아이의 축구가 시작된 거에요.(웃음)"  

2. "아들이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고 싶었다"

박이영이 처음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과정에 대해 들으면서 나는 혹시 아들이 처음 축구를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고 싶지는 않았는지'를 물었다.

축구라는 운동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혹은 프로 축구 선수가 되지 못했을 경우 취업의 문제 등을 걱정해서 축구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어머니들을 그동안 많이 봤기 때문이다. 

"반대는 안 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아주 적극적으로 아들에게 축구를 해보라고 권하거나 그러지도 않았지만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이영이가 어릴 때부터 아들에게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자는 주의였거든요."

"다만 제가 한 가지 꼭 한 것은 있었어요. 저는 이영이에게 '너는 학생으로서 축구를 하는 거지, 축구를 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는 것은 아니다'라고 늘 가르쳤어요. 그래서 아이가 축구 때문에 공부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보습 학원 같은 곳에 가서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게끔 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이영이가 축구부에 들어가면서 초등학생 치고는 꽤 먼 거리를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키가 크지만 그 때는 이영이가 키가 가장 작은 편이었거든요. 그렇게 작은 아이가 자기 하고 싶은거 하겠다고 축구 용품 들어간 큰 가방 메고 다니는 걸 보는데 안타깝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가능하면 학교에 데려다주고 싶었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내리는 곳까지라도 가서 가방이라도 들어주고 싶었고요." 

3.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찾아온 갈림길 

맹기영 씨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한 번씩 아들이 계속 축구를 해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 고민은 어쩌면, 맹기영 씨와 박이영에게만 해당되는 고민이 아닐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는 그렇게 즐겁게 축구를 했죠. 그런데 이제 중학교 2학년 쯤 되니까, 팀에 주전 멤버들이 정해지잖아요. 그 시기에 저도 이영이도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축구가 그동안에는 즐거웠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스트레스도 되고 고민거리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이영이가 다녔던 보인중학교가 잘하는 선수들이 많았는데 이영이는 또 키도 가장 작은 편이고 하니 아들이 주전 멤버에서 밀리게 되니까 마음이 아프고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때는 주전으로 경기를 뛰다가 갑자기 그렇게 되니까요. 그래서 아이가 키가 너무 안 크니까 성장에 대해 검사하는 병원에도 찾아가보고, 축구 선수한테 좋다는 음식은 다 만들어서 먹여보고 그렇게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 무렵 축구를 계속하게 해도 될 것인가 고민이 됐죠. 엄마들은 그래요. 물론 아빠들도 그렇겠지만. 자기 아들이 기왕이면 '톱'이 되길 바라잖아요. 기왕이면 U-13세 대표팀, U-15세 대표팀 그런 팀에도 선발이 됐으면 좋겠고.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건 부모로서의 욕심이죠."

"축구 선수라는 게 꼭 아주 뛰어난 선수들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또 개인적으로는 이영이가 실력적으로 아주 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주전으로 못 뛰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 저보다는 이영이가 더 힘들거라고 생각을 했고, 그런데도 자기가 계속 하고 싶다는데. 그렇다면 계속 하게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박이영은 서울체고에 진학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이영이 재학중이던 바로 그 시기에 서울체고가 해체되는 일이 발생했다. 

"사실 그 때 서울체고에 들어왔던 선수들이 괜찮았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학교가 그렇게 되니까, 선수들도 다 빠져나가고 그 때는 정말 아 아들의 대학 문제는 어떻게 해야되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난감했었죠." 

"그래도 그 때는 명문대는 아니더라도 대학은 갈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꼭 좋은 대학이 아니더라도 대학을 갔으면 했죠. 그런데 이영이가 대학이 아니라 필리핀에 가서 뛰겠다고 하더라고요. 꼭 대학을 가기보다 뛸 기회가 있다면 필리핀으로 가는게 좋겠다고 하면서요."

"그 시점에도 이영이의 선택은 제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결국은 아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또 믿어주기로 했어요. 그 때까지도 늘 그렇게 해왔고 그게 맞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요."

"이영이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돌아보면, 주변에 부모님들 중에 부모의 의사대로 아이들을 끌고 가려고 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아이들이 경기에 못 나가는 것 같다고 하면 부모님들이 데리고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고요. 개인 레슨을 시키던가 아예 학교를 전학을 시킨다던가 그런 경우도 있었고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때 그 학부모님들하고 만나서 이런 이야기도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팀의 중심이었던 선수의 부모님들 중에 이제는 오히려 이영이의 상황을 부러워하는 분들도 있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그 분들이 '아 나도 좀 그 때 아이들을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둘 걸 그랬다' 이런 이야길 하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처음부터 이영이가 스스로 자기가 하고 싶은 꿈을 찾고, 또 자기가 원하는 걸 하게 했었는데 주변에 보면 부모님들이 자기 아이들을 위한다는 마음에 학교나 감독님들하고 관계를 맺고 관계를 통해서 잘 해보려고 하고 그런 부분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것들이 이제 성인 선수가 되고 난 후에는 더이상 통하지가 않는거죠. 성인 선수가 된 후에는 더이상 부모님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스스로 해야 하니까.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하는 편이 좋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저 뒤에서 이영이가 하고 싶다는 것을 도와줬던 것 뿐이었어요."

최근 함부르크를 찾아 아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맹기영 씨(가운데) 
경기가 종료된 후 아들의 사진을 찍고 있는 맹기영 씨. 

4. 필리핀에서 뛰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 

다음으로 그녀에게 물은 질문은 아들이 필리핀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의 심정이었다. 필리핀이라는 곳에서도 축구에 대한 순수한 꿈과 열정을 품고 뛰고 있는 한국의 축구인들이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필리핀은 한국보다 축구의 수준이 떨어지는 곳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학은 결국 이영이의 의사대로 가지 않았고 필리핀으로 가게 됐어요. 물론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있었어요. 필리핀은 아무래도 한국 보다는 축구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그 경우에도 저는 이영이가 중고등학생 때나 마찬가지로 생각했어요. 본인이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그곳에서 영어공부도 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었으니까요."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직은 스무살 밖에 안 됐고 본인도 거기서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그곳에서 한단계 한단계씩 올라가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것은 꼭 축구만이 아니라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아요. 직업을 구할 때도 그냥 무작정 목표만 따라가기보다는 내가 그 목표에 근접한 무언가를 하면서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그 목표에 다가설 수 있는 날이 오는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면, 뜻하지 않게 또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요."  

5. '맨 땅에 헤딩' 같았던 유럽 도전과 마침내 거둔 결실  

필리핀을 떠난 박이영은 포르투갈 마데이라섬의 한 클럽에 테스트에서 낙방하고 이후 오스트리아를 거쳐 슬로바키아 무대 등에 도전하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도전했던 독일에서 2년이 지난 후에 1군 팀과 계약을 맺게 됐다.

그것은 물론 지금 돌아보면 '훈훈한 스토리' 그 당시에는 박이영에게도 그의 어머니에게도 정말 막막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때도 이영이에게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웃음) 그 때도 이영이를 믿었지만, 특히 포르투갈에 혼자 갔을 때는 마음이 정말 같이 갈 수도 없지만 거기서 혼자 얼마나 힘들까 그런 생각에 마음이 정말 그랬어요. 뭐라고 표현하기가 힘드네요. 정말 마음이 참...그랬어요. 아들이 홀로 그곳에 가서 고군분투하는 것 같아서."

"그 때 이영이가 저한테 한 말이 '유럽에서 꼭 뭔가 해내고 오겠다' 하더라고요. 아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까 그래도 저도 좀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결국 긴 우여곡절 끝에 상파울리 U-23팀에서 자리를 잡게 됐을 때,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솔직히 그 때도 저는 처음에는 그래도 팀을 구했다는 말에 한 편으로는 기뻤지만, 사실 1군팀 계약이 아니라 U-23세팀 계약이었기 때문에 처음 자세한 내용을 듣고는 '아 그 돈으로 독일에서 생활이 될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제가 경제적으로 많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물론 그래도 소속팀을 구했다는 건 기뻤지만 생활이 가능할까가 정말 걱정이었어요. 그런데 이영이가 독일에서 너무 좋은 분들을 만나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지내게 됐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도 부담이 되기도 하는 그런 복잡한 마음이었지요."

"그러다가 최근에 아들이 1군 팀과 드디어 계약을 했는데요(웃음) 아 이제야 내 아들이 프로선수가 됐구나. 정말 어엿한 선수가 됐구나. 남부럽지 않은(웃음). 왜냐하면 걱정이 많이 되잖아요. 제 아들이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닌데. 그런데 드디어 1군 팀과 계약을 했다고 하니까 아,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기쁜 와중에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박이영은 1군 팀과 계약한 직후에 자신의 돈으로 그의 어머니를 함부르크로 초대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처음으로 아들이 2년 동안 선수생활했던 함부르크에 찾아와서 아들이 실전경기에서 뛰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경기를 지켜보는 중간 중간 주먹을 꽉 쥐며 긴장을 놓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영이가 뛰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이네요. 4년 만에 아들이 뛰는 모습 보니까 그 때랑은 좀 힘이 달라졌다고 할까요(웃음). 물론 자랑스럽기도 했고요."

인터뷰를 위해 이동하던 중 비가 내리자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어머니에게 입혀드리는 박이영의 모습 

6. 박이영의 어머니가 박이영에게, 박이영이 어머니께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맹기영 씨에게 이제 드디어 유럽의 1군 팀 선수가 된 아들을 보는 전체적인 소감과 앞으로의 바람에 대해 물었다. 

"실감이 나는 듯 하면서도 아직 안 나는 것 같은 느낌이 가장 강한 것 같아요. 처음에 프로팀이랑 계약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 이럴 때 그렇게 말하는구나 싶었어요. 밥을 먹어야 되는데 밥이 안 넘어가는 그런 상황이 오더라고요."

"그리고 앞으로 바라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나 꿈이 있잖아요. 본인의 꿈을 한 단계 한 단계 잘 이루면서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큰 것 같아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지만 다치지 않고, 꾸준히 선수생활을 했으면. 선수생활 이후에도 본인이 만족한 삶을 살았으면."

"저는 아들이 잘 된다고 제 삶이 더 나아진다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아들의 인생은 본인의 인생, 본인의 것이잖아요. 그래서 스스로가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이 제가 가장 원하는 점이에요." 

어머니와 기자의 인터뷰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이영에게도 어머니께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었다. 

"저는 특히 아버지와 항상 같이 지내질 못했는데,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길 바라시는 부분이 조금 있었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항상 제가 바라는 대로 하길 바라셨습니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게 있는데도 부모님이나 주변 분들의 영향으로 못하게 되는 친구들이 많은데. 저는 어머니께서 늘 저를 믿어주시고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7. 박이영의 어머니가 다른 축구 선수들의 어머니들께 

이번에는 박이영의 어머니에게 현재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또는 미래에 비슷한 상황에 놓일 어머니들 혹은 부모님들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는지를 물었다. 

"한국의 경우는 특히 아이들이 축구를 한다고 할 때 많은 분들이 아이들이 꼭 국가대표선수가 되거나 최고의 선수가 되거나 다른 아이들보다 잘하길 바라는 마음이 큰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마치 실패하는 것 같이 느끼는 분들도 많은 것 같고요. 주변을 보면 프로팀 선수가 된 아이도 있고 내셔널리그 선수가 된 아이도 있는데 내셔널리그 선수가 됐다고 부모님들도 아주 실망하거나 그런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제가 겪어보니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본인의 수준에 만족하고 축구를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독사진을 찍는 것을 유독 쑥스러워했던 박이영의 어머니 맹기영 씨. 

8. 축구 선수의 어머니로 산다는 것 

마지막으로, 누구보다도 우여곡절이 많고, 감동적인 과정을 통해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아들을 둔 그녀에게 '축구 선수의 어머니로 산다는 것'이 힘든 점은 없었는지 물어봤다. 

"일반 학생들은 시험을 보는 기간이 있곤 한데, 축구선수는 매 주말 마다 경기라는 이름의 시험을 봐야했던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늘 부상에 대한 걱정을 해야했던 점이 힘든 점이었어요."

"직장인들은 직장에 들어가면 시간이 지나면 진급을 하고 봉급도 올라가는데, 축구선수는 계속해서 발전하지 못하거나 잘하지 못하면 낙오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점이었고요. 그리고 직장인이 아닌 축구 선수라는 이유로 '아들 경기에 뛰어? 안 뛰어?'라고 주변에서 물어보는 시선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습니다." 

"그런 여러가지 부담감이나 걱정도 있었지만 저는 늘 아들이 원하는 길을 걷길 바랐고 이영이가 잘 이겨내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에필로그

축구 선수의 '어머니'와 함께 하는 인터뷰는 제가 꽤 오래전부터 기획해왔던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계기가 됐던 것은 세계적인 미드필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그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서였습니다.  

이니에스타가 처음 바르셀로나 아카데미 '라 마시아'에 갔던 날, 어린 시절부터 그를 항상 데리고 다니며 축구를 가르쳤던 그의 아버지는 도저히 아들과 떨어질 엄두가 나지 않아 이니에스타를 다시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런 그를 말리며 그의 아내이자 이니에스타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이니에스타를 데리고 돌아가면 당신은 이기적인 아빠인 거에요. 적어도 우리 아들에게 기회를 줘요." 

그 때, 그 어머니의 한 마디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미드필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 그와 같은 어머니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아들을 믿어주고 도와주며 때로는 아버지들보다도 더 큰 역할을 하는 어머니들 말입니다. 

이번 칼럼에서 소개해드린 박이영 선수와 어머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와 닮은, 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어머니와 아들이 많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칼럼에 담긴 두 사람의 이야기가 현재 한국의 축구 선수 가족, 그리고 미래의 축구 선수를 꿈꾸는 많은 유소년 선수들의 가족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축구 선수들의 '아버지'들 뿐 아니라 '어머니'들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야기하고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국의 모든 축구 선수 어머니들이 스스로를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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