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이글스의 필살기 - 위장 번트

조회수 2017. 5. 18. 09: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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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묘한 일이다. 그들에게 그런 일은 늘 8회에 일어난다. 응원단이 모두 일어나 열정적인 육성을 쏟아낼 무렵이다.

어제(17일)도 그랬다. 꼭 잡고 싶은 경기였다. 이상하게 불편한 상대다. 그래서 더 그런 지 모른다. 전날(16일) 에이스(비야누에바)를 내고도 1점 차로 아픈 패배를 당했다(스코어 1-2). 한참 올라가던 상승세가 그만 한풀 꺾이고 말았다. 목동의 저주는 고척으로 옮겨서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작년 9월부터 벌써 6연패다.

어제는 그래도 수비가 버텨줬다. 초반에 몇 번 넘어갈 뻔한 고비가 있었다. 정근우가 막아주고, 하주석이 몸을 날렸다. 양성우도 레이저 빔으로 배영수를 엄호했다. 덕분에 8회까지 5-3, 두 점차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하다. 홈 팀은 아직 2번의 공격 기회가 남았다. 한 점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훨씬 덜 따가울 것 같다. 상대가 째려보며 따라오는 뒤통수가 말이다.

8회 이글스의 공격이 시작됐다. 때맞춰 3루쪽 관중들도 일제히 일어났다. 그리고 뒷짐을 지더니 ‘최강 한화’를 우렁차게 부르짖는다. 고척 돔이 쩌렁쩌렁 울린다. 승부처니까 깨어나라는 알람 소리 같았다. 117개를 던진 배영수는 탈진한 표정이다. 땀범벅으로 타자들의 공격을 지켜보고 있다. 

8회. 이글스 팬들의 육성 응원이 터진다. 선수들을 깨우기 위한 알람 소리같다.      sky sports 중계 화면

병살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사전 작업 

원정 팀의 8회는 좌타 라인으로 시작됐다. 양성우 - 장민석 - 하주석으로 이어진다. 홈 팀은 여기에 맞는 좌투수 금민철을 올렸다. 첫 타자는 초구를 건드려 2루 땅볼 아웃. 너무 쉽게 아웃 하나를 바쳤다.

그러나 다음 타자 장민석은 눈치가 빠르다. 호락호락 배트를 내주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안타를 2개나 쳤다. 상대가 쉽게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빤하다. 금민철의 거듭된 슬라이더 유인구에 꿈쩍도 않는다. 볼넷. 불씨 하나가 피어올랐다.

1사 1루에서 등장한 타자는 하주석. 2번에서 8번으로 인사조치 당한 뒤로 반성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눈부신 호수비 말고도, 벌써 안타 2개에 1타점을 올렸다. 네번째 타석에도 각성은 계속됐다. 카운트 0-2의 불리한 상황에서 깨끗한 우전 안타를 만들어낸 것이다. 발 빠른 장민석은 어느 틈에 3루까지 내달았다.

김광수 3루 코치가 최재훈을 불러 뭔가 의미심장한 지시를 내리고 있다.   sky sports 중계 화면

1사 1, 3루가 됐다. 수비 쪽에서는 무조건 땅볼을 생각한다. 더블 플레이로 한꺼번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타석에는 최재훈이다. 상대방에게는 더 이상 반가울 수 없는 손님이다. 달리기 실력이 최악이기 때문이다. 병살로 엮기에는 최적의 먹잇감이다.

홈 팀 벤치는 굳이 오른손 투수로 교체를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좌투수가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1루 주자의 움직임을 묶는 게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금민철의 슬라이더다. 최재훈의 몸쪽으로 떨어트리기만 하면 된다. 그럼 3루수/유격수 쪽으로 땅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원정 팀 벤치라고 왜 그 생각을 하지 않겠나. 1점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중요한 선결 과제는 바로 병살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철저한 팀 전술 : 타자와 주자 2명의 역할 분담 

1, 3루가 되자 김광수 코치가 타석에 들어가려는 최재훈을 불러세운다. 그리고 뭔가 은밀한 지시를 내린 뒤 가슴을 한 번 툭 친다. 이윽고 덕아웃에서 나온 사인은 3루 코치를 거쳐 각자에게 전달됐다. 타자, 3루 주자, 그리고 1루 주자에게도.

                                                                                                                                                                               sky sports 중계 화면

초구였다. 금민철이 투구 동작에 들어간 순간이다. 3루 주자 장민석은 홈 쪽으로 스타트를 끊는다. 단 3발짝 이내로 움직여야 한다. 곧바로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타자 최재훈은 번트 모션을 취한다. 영락없는 스퀴즈 플레이처럼 보인다. 1, 3루 수비는 모두 앞쪽으로 쏠린다. 포수 김재현은 반사적으로 3루 주자를 힐끔 거리게 돼 있다. 그 찰라의 순간, 승부는 끝이다. ‘안심’ 스타트를 끊은 1루 주자 하주석은 2루에서 충분한 타이밍을 만들 수 있다. 포수는 2루에 던져보지도 못한다. 1사 2, 3루. 더 이상 병살의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위장 스퀴즈가 성공한 몇가지 부수적인 요건을 꼽으면 이렇다. ▶ 상대 벤치가 흐름을 끊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타임을 건다든 지 하는) ▶ 포수의 경력이 짧다. ▶ 수비의 ‘간 보기’(이를테면 1루 견제구 같은)가 생략됐다. 여기에 2점 차이라는 여유가 작전의 신속한 결행을 가능하게 했다.

이 찬스에서 원정 팀은 3점을 뽑아내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물론 페이크 번트의 성공과 득점의 상관 관계에 대한 이론은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종반 승부처를 빛낸 작전의 가치는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페이크 번트 - 더블 스틸, 5월 2일 문학구장 

사실 이글스의 위장 번트 작전은 올 시즌 들어 종종 선보였다. 그 중 백미는 이달 초, 그러니까 5월 2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SK전이었다.

당시도 똑같은 8회였다. 3-5로 뒤지던 원정 팀은 무사 1, 2루의 동점 기회를 맞았다. (대주자) 강경학과 장민석 같은 달리기 선수들이 누상에 포진하고 있었다. 9번 허도환 대신 최윤석이 대타로 나왔다. 수비는 당연히 보내기 번트에 대비한 시프트를 펼치고 있었다.

카운트 1-0에서 2구째. 최윤석은 예상대로 번트 동작으로 변신했다. 3루쪽을 겨냥한 모션이었다. 왜 아니겠나. 그 상황이면 당연히 그쪽으로 굴려줘야 성공 확률이 높다.

3루수 나주환은 역시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반사적으로 앞으로 몇 걸음 스텝을 밟게 돼 있다. 이게 상대가 노리는 빈 틈이다. 번트 동작은 ‘구라’였고, 2명의 주자를 출발시킨 더블 스틸이었다.

나주환이 뒤늦게 베이스-인 했지만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포수 이재원의 송구는 정확했지만, 강경학을 잡아내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5월 2일 와이번스전에서 성공시킨 위장 번트.                 sky sports 중계 화면
3루수 나주환이 뒤늦게 백스텝을 밟았지만 강경학을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sky sports 중계 화면

이글스는 여기서 내야 땅볼로 1점을 얻는데 그쳤다. 4-5로 따라간 뒤 정작 역전은 9회에 성공시켰다.

하지만 팬들의 뇌리에는 8회 위장 번트에 이은 더블 스틸 성공이 더 강하게 남아 있다. 그만큼 짜릿한 흥분을 선사한 장면이었다. 어쩌면 스몰볼로 한창 줏가를 높이고 있던 트레이 힐만 감독을 상대로 한 것이었기에 더 그랬는 지도 모른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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