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박병호 진화의 증거 - 투(two) 스트라이크를 견디다

조회수 2017. 3. 20. 09:4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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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어제(한국시간 19일) 경기 중 한 장면이다. 5회 세 번째 타석이었다. 4구째 변화구에 완전히 당했다. 어이없는 헛스윙으로 두 번째 스트라이크를 먹은 것이다. 카운트는 2-2로 불리해졌다. 예전 같으면 삼진을 걱정할 타이밍이다.

그러나 달라졌다. 급할 것 없다는 투다. 타자는 타석에서 잠시 벗어난다. 일단 발을 빼고, 시간을 갖는다. 장갑의 찍찍이를 바로잡고, 헬멧을 매만진다. 배트도 한번 고쳐 잡는다. 그리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이윽고 타석에 다시 선다. 훨씬 차분해진 모습이다. 5구째. 또 변화구였다. 이번에는 끝까지 따라붙는다.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냈다. 


WBC가 만들어낸 묘한 상황들 

샌디에이고가 뜨겁다. WBC 2라운드의 격전 때문이다. ‘죽음의 F조’는 매경기가 치열을 넘어 처절한 지경이다. ML 올스타급들이 목숨 걸고, 혈투를 벌이고 있다. 그중 백미는 어제(한국시간 19일) 열린 미국-도미니카의 단두대 매치였다. 무려 4만 명이 넘는 관중이 몰렸다. 월드시리즈 못지않은 열기였다.

하지만 앞선 경기는 달랐다. ‘죽음의 조’ 답지 않게 썰렁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미 없는 승부였기 때문이다. 푸에르토리코는 2승, 베네수엘라는 2패였다.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었다. 때문에 연일 피로에 지친 주축 선수들은 월차 휴가 쓰는 날이었다.

그 바람에 벤치 멤버들이 기회를 얻었다. 그중에 발군은 푸에르토리코의 4번 타자였다. 홈런 2개를 치며 혼자 신바람 냈다. 애꿎은 분풀이에 베네수엘라는 전패(3패)의 수모를 당했다.

쓸데없는 경기에서 흥분한 그의 이름은 케니 바르가스(27)다. 미네소타 트윈스 소속의 1루수/지명타자다. 새로운 프런트 오피스가 밀고 있는 타자다.

감독의 칭찬, 달라진 미디어의 시선 

불과 한 달 전이다. 미네소타의 모두가 바르가스 편이었다. 새로 취임한 야구 담당 책임자(CBO)도, 단장도, 코칭스태프도, 언론들도…. 이구동성이었다. 트윈스의 지명타자 자리는 그의 몫이라고 한 목소리였다. 덕분에 지난해 거액을 투자했던 ‘신상’은 찬밥 신세가 됐다. 40인 로스터에서도 제외됐다.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하는 게 운명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묘하다. 3주 동안 돌발적인 변수들이 등장했다. 우선 바르가스의 처지다. WBC로 차출되는 바람에 애매해졌다. 가기 전 시범 경기에서 13타수 1안타로 부진했다. 정작 WBC에서도 후보로 밀려나며 보여준 게 별로 없다.

반면 그 덕분에 ‘찬밥’에게 기회가 생겼다. 시범 경기 출전수가 부쩍 늘어났다. 거기서도 대충하면 모르는데, 그게 아니었다. 4할을 오르내리는 타율에 홈런도 3개나 쳤다. mlb.com 같은 매체는 남의 속도 모르고 철없는 분석을 내놨다. ‘개막전 지명타자는 박뱅이 맡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매번 잘하니 어쩔 수 없다. 기자들도 자꾸 물을 수 밖에. 난처한 건 감독이다. 폴 몰리터는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는 스윙이 다소 거칠었지만, 올해는 아니다. 스트라이크 근처에서만 나온다. 구속에 압도되는 느낌도 없다. 바르가스의 WBC 출전으로 생긴 기회에서 아주 잘 하고 있다.” 

거듭된 안타는 투(two) 스트라이크에서 나왔다 

그는 분명히 달라졌다. 무엇이 변했을까. 사람마다 다양한 의견이다. 벤치 코치(조 바브라)는 이렇게 분석한다. “지난해는 약간 겁먹은 모습이었다. 빠른 볼 스피드가 머리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요즘은 침착하다. 긴장하지 않는다. 불안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감독, 코치의 말들이 맞을 것이다. 전문가들 아닌가. 하지만 <…구라다>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겠다. 그런 뜬구름 잡는 말은 어렵다. 구체적인 팩트로 얘기하자.

최근 그의 경기에서 주목해야 할 장면이 있다. 타격 때 볼 카운트다.

어제 2개의 안타를 보자. 릭 포셀로(보스턴)에게 뽑아낸 것들이다. 미디어들은 사이영상 수상자에게 멀티 히트를 쳤다고 흥분했다. 물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 내면을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공격했느냐는 점이다.


첫 안타를 뽑은 두 번째 타석(3회 1사 1루)이다. 카운트가 1-2로 밀렸다. 볼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1루 쪽으로 파울이 나왔다. 4구째. 바깥쪽 낮은 직구였다. 골라낸 눈이 좋았다. 나갔으면 헛스윙, 아니면 힘없는 2루 땅볼(병살타) 쯤 됐을 것이다.

그다음 카운트 2-2에서 포수는 몸쪽으로 앉았다. 결정구로 인코스 빠른 볼을 택한 것이다. 포셀로는 정확하게 요구하는 지점으로 던졌다. 아마 2016년의 박뱅이었다면 결과는 뻔했을 것이다. 헛스윙 아니면 팝 플라이?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괜찮은 타이밍을 만들어냈다. 투수 쪽으로 강하게 날아가는 타구가 나왔다. 결과는 중견수 앞 안타.

두 번째 안타는 5회(무사 1루)였다. 투구 수가 90개에 육박하던 포셀로는 변화구(커브, 슬라이더) 위주로 패턴을 바꿨다. 여기에 타이밍이 춤을 췄다. 헛스윙과 파울이 나오며 카운트는 2-2로 불리해졌다. 5구째 승부구 역시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슬라이더였다.

처음에는 타자가 당한 것처럼 보였다. 허리가 완전히 빠지며 타격폼이 무너졌다. 하지만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배트 끝에 걸린 타구는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행운의 안타였다. 물론 잘 맞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손목의 기교와 순간적인 대응력이 돋보이는 타격 기술이었다. 

지난해의 처참한 삼진 비율 

사실 작년 6월까지는 그랬다. 투 스트라이크가 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다음은 안 봐도 뻔했다. 빠른 볼에는 못 따라가고, 변화구에는 속았다. 그 결과, 절반 이상은 삼진이었다.

◇ 2016 카운트별 삼진 비율

▶ 3-2 (55.6%)

▶ 2-2 (50.7%)

▶ 1-2 (63.9%)

▶ 0-2 (62.2%)

그런데 최근에는 달라졌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대응력이 훨씬 좋아졌다. 비단 어제 경기만이 아니다. 16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는 3타수 1안타였다. 첫 타석 중전 안타 이후 우익수 플라이, 유격수 라인드라이브에 그쳤다. 그럼에도 타구의 질은 괜찮았다.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불리한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나온 공격들이었다. 중전안타도 1-2로 몰린 카운트였다. 그리고 뒤에 나온 잘 맞은 타구들도 3-2, 1-2로 투수 카운트였다.

이번 시범경기 두 번째 홈런(2월 27일)도 그렇다. 마이애미 투수 호세 우리나에게 0 볼, 2 스크라이크로 완전히 밀린 상태였다. 거기서 96마일짜리 빠른 볼을 담장 너머로 보냈다.


물론 시범경기일뿐이다. 초청 선수라는 신분이 바뀐 것도 아니다. 괜한 설레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팩트가 가리키는 진실은 분명하다. 바브라 코치의 말처럼 그는 겁먹지 않았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도 여전히 타격 기회를 찾아내고 있었다. 가장 확실한 진화의 증거일 것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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