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모의 Respect] 3주 사이 '뱀'에서 '영웅', 축구는 결국 결과로 말한다

조회수 2017. 3. 16. 13: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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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에리 경질 후 3연승 달리며 챔스 8강 진출한 레스터, 그들에 대한 현지 반응과 냉정한 축구계 현실
레스터 시티가 세비야를 2대 0으로 꺾고 유럽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한 다음날 아침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의 스포츠 1면. 레스터 시티의 선수들을 '영웅들(Heroes)'이라고 표현한 것이 눈길을 끈다.  

"Heroes"(영웅들)

3월 15일, 잉글랜드의 일간지 '데일리메일', '더선' 등에서는 레스터 시티의 유럽챔피언스리그 8강행을 소개하면서 '영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지난 2월 24일, 팀에 133년만의 리그 우승을 안겼던 라니에리 감독이 경질되면서 레스터 시티가 전세계 축구팬들의 비판대에 올랐던 날로부터 불과 3주 만의 일이다. 

라니에리 감독이 경질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로 한국은 물론 영국 및 세계의 축구팬들 사이에는 '은인'인 라니에리를 경질했던 그들이 그대로 강등 당하며 몰락하길 바랐던 팬들이 다수였고, 동시에 일부 라니에리 감독의 경질이 성적부진으로 인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동의하는 팬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한 달 사이 레스터가 보여준 반전과 또 다른 반전(라니에리가 경질됐던 순간, 그들이 그 직후에 3연승을 달리며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할 거라 예상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새옹지마의 새옹지마' 같은 이 상황의 이면에는 축구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숨어있다.

'축구는 결국 결과로 말한다'는 어쩌면 조금 씁쓸하지만, 간단명료하고 단순한 진실이다.

같은 날, 다른 일간지인 '더선'의 기사에도 '데일리메일'과 마찬가지로 '영웅'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1. '뱀'에서 '영웅'으로, 급속도로 변하는 현지 반응

라니에리 감독이 경질됐던 지난 2월 말, 레스터 시티 공식 페이스북 및 각종 SNS 등을 통해 영국 현지 팬들이 가장 널리 사용됐던 표현 중 하나는 'Snake'(뱀,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칭하는 속어)이었다. 선수들을 '뱀'이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소셜미디어에 여러마리의 뱀들이 뭉쳐있는 사진을 게시하며 그것을 레스터 시티 선수단이라고 일컫는 장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본 칼럼에 이미지로 첨부한, 잉글랜드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읽히는 신문들 중 두 일간지인 '데일리메일'과 '더 선'에서 같은 표현(Hero : 영웅)을 썼다는 것은 레스터 시티에 대한 현지 언론의 평가가 아주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현지팬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라니에리를 잔인하게 경질한 레스터 시티에 대한 반감이 남아있지만, 동시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라니에리의 경질이 결과적으로는 옳은 결정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비야전 승리 이후, 레스터 시티 공식 페이스북에 팬들이 남긴 코멘트(댓글). 가장 많은 동의를 얻은 코멘트에서 살펴볼 수 있듯 여전히 라니에리 감독을 경질한 것에 대한 불만이 있지만 동시에 라니에리를  경질한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It was a good decision to sack Ranieri)는 반응도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어가고 있다. (레스터 시티 공식 페이스북 캡쳐)

라니에리 감독 경질 당시 비판 일색이었던 현지 전문가들의 반응도 여전히 혼재되어 있긴 하지만 점점 바뀌어가고 있다. 레스터 시티의 챔피언스리그 8강행이 결정된 직후, BT 스포츠에서 펀딧(축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리오 퍼디난드(맨유 레전드)와 스티븐 제라드(리버풀 레전드)는 아래와 같은 의견을 밝혔다.  오랜 선수 경험을 갖고 있는 그들의 말에는 이미 과거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과, 포커스를 더이상 라니에리 전 감독이 아닌 셰익스피어 현 감독으로 두고 있는 모습이 엿보인다. 

"레스터 시티는 한동안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팀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지난 시즌의 자세를 되찾았다. 오늘(세비야전) 그들의 플레이를 보면 분명히 그것을 알 수 있다. 오늘 그들의 플레이는 정말 헌신적이고 환상적인 팀플레이였다."(리오 퍼디난드)

"셰익스피어 감독의 공도 인정해야 한다. 그는 팀에 열정을 다시 불어넣었고 선수들의 헌신적인 자세를 다시 이끌어냈다. 지금 레스터 시티 선수들은 전력을 다해서 뛰고 있다. 그것이 그들이 지난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이 셰익스피어 감독이다."(스티븐 제라드)    

 레스터 시티의 8강 진출을 'Dream time'(꿈 같은 시간)이라고 표현한 데일리 익스프레스 

2. 무엇이 달라졌나? 달라진 건 단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불과 한 달 사이에 레스터 시티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크게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혹은 과연 그 한 달 사이에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사실 달라진 건 단 하나 뿐이다. 라니에리 경질 후 레스터 시티의 '결과'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레스터 시티는 라니에리 경질 직후 3연승을 달리고 있는데, 그 3연승 중 첫 상대는 리버풀(이 경기에서의 패배로 클롭 감독이 커다란 비판에 직면했던)이었고 다음 상대는 강등을 피하기 위한 직접적 경쟁 상대인 헐 시티였으며 마지막 세번째 상대팀은 스페인 라리가에서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에 이어 3위에 올라있는 세비야였다.

레스터 시티는 이 3경기에서의 승리로 강등권 경쟁에서 급한 불을 끄는데 성공했고, 특히 세비야 전에서의 2-0 승리로 16강 1차전에서의 1-2패배를 극복하고 8강에 진출했다. 지난 시즌 레스터의 리그 우승이 클럽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듯, 그들이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한 것 역시 최초의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세비야 전이 끝난 직후 BBC 라디오를 통해 소개된 한 팬의 인터뷰가 화제가 됐다. 자신을 9세부터 레스터 시티의 팬이라고 말한 크리스(Chris)라는 이름의 이 팬은(42세이므로 33년 동안 레스터 시티를 응원한 셈이다) 라디오 방송에서 실제로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눈물을 참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스터 시티가 어려울 때도 좋을 때도 늘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해왔다. 레스터 시티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렵게 보냈다. 그러나 오늘, 나의 이 작은 팀이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했다.(그는 바로 이 문장을 말하면서 울먹였다) 나는 너무 행복하고 그래서 눈물이 난다."

3. 냉정하지만 분명한 진실, 축구는 결국 결과로 말한다

레스터 시티가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몇차례 오르내릴 때도, 파산 위기에 직면했을 때도, 라니에리 감독과 함께 133년 만의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또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했던 순간에도 변함없이 레스터 시티를 응원해온 이 팬의 인터뷰에는 더이상 라니에리 감독에 대한 언급이나 라니에리 감독을 경질한 팀에 대한 원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팀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방송 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 시즌 우승을 향해 가는 레스터라는 도시 전체의 흥분을 현장에서 직접 봤던 내가 라니에리 경질 이후 레스터 시티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한편으로는 위화감을 느끼면서도(라니에리가 경질된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팀의 일거수 일투족에 기뻐하는 팬들의 모습에) 그것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현지에 있는, 또 그 경기장 안에 있는 팬들의 반응이다.

레스터 시티가 골을 넣을 때마다, 승리할 때마다 그 팬들의 반응에는 꾸밈없는 기쁨의 모습이 드러난다. 라니에리가 경질된 것은 분명히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정작 그 레스터의 팬들은(그들 중 상당수가 라니에리의 경질이 유감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팀의 성공에 환호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즌의 레스터 시티가 이뤄낸 기적이 기적일 수 있었던 이유, 그들의 업적이 축구 역사에 영원히 남을 이유, 그리고 놀랍게도 바로 그 레스터 시티의 선장이었던 라니에리 감독이 우승 후 1년도 되기 전에 경질됐던 이유, 그리고 라니에리 경질 후 3경기 만에 레스터 시티 팬들의 태도가 급속도로 달라지고 있는 이유, 그 모든 것은 결국 하나를 의미하고 있다.

축구는 결국 결과로 말하는 스포츠이며 축구를 축구이게 하는 근원인 축구팬들이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원하는 것 역시 결과라는 사실을.   

* 레스터 시티 선수단의 태업 논란에 관하여

현재 영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레스터 시티에 대해 여전히 남아있는 의문은 레스터 시티 선수단의 '태업' 논란이다. 라니에리 감독의 공으로 최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한 레스터 시티의 선수단이 감독에게 등을 돌리고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현재까지도 레스터 시티가 비판대에 올라있는 가장 큰 이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연 그들이 정말로 태업을 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현재로서 가장 정확한 대답은 '지금은 알 수 없다'이다. 과연 라니에리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는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밝혀질 것이다. 과거 스콜라리 감독,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 시절 선수단의 태업 논란을 빚은 바 있는 첼시의 경우도 당시에는 사실을 부정했으나 시간이 지난 후 선수들의 자서전 등을 통해 진실이 밝혀진 바 있다.

아무리 정황상 그렇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선수단과 현 감독이 모두 공식적으로 '불화설'을 부정한 이상, 확실한 증거 없이 태업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섣부른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태업 혹은 감독과의 불화설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의 불화설을 가장 먼저 보도한 현지 매체가 평소 가쉽을 다루지 않고 공신력이 가장 높은 미디어 중 하나인 '더타임스(The Times)'라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으며, 레스터 시티의 선수들이 태업을 한게 확실하다거나 분명히 드레싱룸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 주장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 역시 마이클 오웬, 게리 네빌 등 한국 축구팬들에게도 익숙한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 출신 방송인들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선수 출신인 그들은 드레싱룸 안에서 혹은 선수단 안에서 감독과 선수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전 웨일즈 국가대표 선수로 현재 BBC에서 펀딧으로 활동 중인 로비 새비지는 데일리미러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수들이 공식적으로 나서서 '그래 맞다, 우리가 구단주를 만나서 감독에 대해 불평을 했다'고 인정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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