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이런 X장, 박병호 기사는 뭐가 이렇게 어려워

조회수 2017. 2. 1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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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철저한 시스템과 계약이 그를 보호할 것이다

같이 일하던 후배가 있었다. A라고 하자.

가끔은 그렇게 묻고 싶은 친구였다. ‘넌 도대체 왜 야구기자를 하니?’ 비하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고급 인력이 이쪽에서 고생하는 걸 보면 우리끼리 자조적으로 그런 얘기를 한다. A가 그런 후배였다. 조용하지만 출중했다. 특히 영어 실력이 탁월했다. (기억으로는 국문과 출신이었다.)

하루는 그가 조심스럽게 의견 하나를 제시했다. 용어의 해석에 대한 문제였다. Designated for assignment. 당시는 거의 대부분 매체가 ‘지명 할당’이라는 말로 번역했다. A는 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하긴 그렇다. 한국말인데도 선뜻 와닿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구라다> 개인의 견해다. (아직도 이 표현을 쓰고 있는 매체들이 있기 때문에.)

A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방출 대기’라는 표현이다. 낯설기는 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치에 맞는 구석이 많다. 신분이 바뀌는 과정을 설명하는 말 아닌가. 마이너리그로 가더라도 메이저리그 구단 입장에서는 방출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처럼 1,2군의 관계가 아니다. 독립적인 별개의 회사이기 때문이다.) 대기발령, 전역대기 같은 용어도 연상돼 이해가 편했다.

이후로 10년 정도가 지났다. 이제는 designated for assignment를 방출 대기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여전히 ‘지명 할당’, ‘계약 이관 공시’ 같은 용어로 풀이하는 매체들도 있다.

참고로 A는 몇 년 후 직업을 바꿨다. 훨씬 더 좋은(?) 직장에 공채로 입사했다. 당시 토익 점수가 990점이었다는 동료들의 수근거림을 들은 기억이 난다.

낯선 용어들이 가득한 뉴스  

짜증이 몇 배로 밀려온다. 최근 박병호와 관련된 기사들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일단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다. 한결같이 언짢고, 자존심 상하는 뉴스 뿐이다. KBO 리그를 통째로 씹어먹던 슬러거 아닌가. 그것도 몇 년에 걸쳐서, 압도적인 위력으로.

게다가 그렇게 반듯하고, 선한 인상의 그이기에 안타까움이 더하다. 팬들 사인도 잘해주고, 대리 운전이랑 친하고, 감자칩도 별로 안좋아하게 생겼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길고 긴 ‘구리 본즈’ 시절을 이겨낸 인간승리 아니었나. 긴 고생 끝냈으면, 꽃길만 걸어야지. 다시 또 흙길로 내처지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

그런 짜증을 부추기는 게 뉴스의 난이도다. 뭔 말인지 도통 알아먹기 힘들다. 낯선 용어들 투성이고, 복잡한 절차로 한가득이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머리만 복잡해진다. 그나마 친절한 설명과 해설이 장착된 기사도 많다. 하지만 그 역시 ‘알듯 모를듯’이다.

토익 990점짜리가 어렵사리 해독해낸 방출 대기가 대표적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40인 로스터, 마이너 옵션, 클레임, 초청선수…. 첩첩산중이다. 며칠 전 나온 표현도 아리송하기 짝이 없다. ‘웨이버를 통과하고, 잔류하게 됐다’는 기사였다. 통과라니? 뭔가 잘 됐다는 뜻인가? 그리고 잔류는 또 뭔 소린가?

미국 기자들은 이렇게 썼다. ‘Twins’ Byung Ho Park clears waivers, designated to Triple-A….’ 그러니까 웨이버 상태가 사라지고, 이제 마이너리그 소속이 됐다는 뜻이다. 별로 잘 된 것도 없다. 그걸 우리말로 번역해 놓으니 또 물음표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다.

1막은 구단의 주도권, 그러나 2막은 다르다 

사실 간단한 얘기다. 괜히 (미디어의) 품위를 지키느라 말이 어려워진 것이다. 주인공과 팬들에게 상처줄까봐 조심조심 다루다가 표현이 꼬이는 것이다.

결국 사태는 아주 명료하다. 메이저리그 미네소타 구단은 박병호가 필요없게 됐다. 그걸 위한 절차를 진행한 것 뿐이다. 직장으로 치면 잘 나가던 실세를 완전 한직으로 발령낸 것이다.

그럼 일은 여기서 끝난 것인가. 아니다. 결정적으로 다른 게 한가지 있다. 오늘 <…구라다>가 진짜로 하려는 얘기도 그것이다.

이 사태를 인식하는 데는 단계의 설정이 중요하다. 바로 1막과 2막의 구분이다. 1막은 이제 끝났다. 구단이 완벽하게 장악했던 시간이었다. 반대쪽은 철저히 유린됐다.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두 손, 두 발이 다 묶인 상태에서 마이너리그로 쫓겨났다. 절망만 남았다.

그런데 강조해야 할 사실이 있다. 2막이 남았다는 점이다. ‘마이너에서 열심히 하면, 좋은 기회가 주어지겠지, 뭐.’ 그런 따위의 막연함이 아니다. 훨씬 더 구체적인 팩트들이 존재한다. 

선수의 권익 보호를 위한 수많은 안전장치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왜 이렇게 어렵고, 생소한가? 한국말로 해도 못 알아먹겠는가?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역설이 존재한다.

난해함의 이유는 하나다. 우리에게 없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왜 없냐고? 그건 리그의 수준 차이다. 그쪽이 훨씬 더 선진적인 시스템이라는 뜻이다. 유구한 역사와, 민주적인 전통을 거치며 발전시킨 제도의 결과다.

무엇을 위해서?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마이너리그를 이용해 함부로 취급되거나, 심지어 버려지는 구단의 전횡을 막기 위한 시스템인 것이다.

이를테면 Designated for assignment(DFA)가 그렇다. 구단이 임의로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내는 걸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포함됐다. 일단 올해는 박병호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나 내년에는 다르다. 두번째로 이 조치를 하면 반발할 수 있다. 이때는 거부하고 FA를 선언할 수 있다. 마음놓고 시장에 나가서 새로운 팀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네소타가 내년 이후에도 계속 박병호를 열외로 한다고 치자. 그럼 DFA 없이 그냥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내야 한다. 이걸 옵션을 행사한다고 표현한다. 횟수는 3번으로 정해졌다. 지난 해 이미 한번이 사용됐고, 2번 남았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자. 2019년까지 계속 마이너리그를 전전한다치자. 그 이후에는 상황이 변한다. 함부로 내릴 수 없는 신분이 된다. 3일간의 웨이버 공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경우 다른 팀에서 ’니네가 필요 없으면, 우리가 쓸게‘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면(claim) 뺏기게 된다.

그러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나은 상황이 보장된다는 뜻이다. 이 사태의 2막이 가진 특징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끝까지 콜업이 없더라도, 그 때 나이가 33~34세다. 1루수에게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닐 것이다.

그동안 계약된 연봉(평균 292만 달러. 약 34억원)은 또박또박 통장에 꽂힌다. 그리고 마지막 해는 50만 달러(약 5억 8천만원)의 전별금(바이아웃)까지 받고 ‘빠이빠이’ 할 수 있다. 

26살의 박병호가, 오늘의 박병호에게 하는 충고 

물론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당사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처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절망은 거기까지다. 냉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넘어졌다. 옷에 흙도 묻고, 무릎이 까져서 피도 좀 난다. 사람들도 쳐다본다. 그렇다고 가던 길을 멈출 필요는 없다. 흙은 털면 된다. 피는 곧 멈출 것이다.

재기는 충분하다. 당장 스프링캠프에서 다시 발탁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시즌 중에도 언제든 기회는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지 모른다. 하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다. 철저한 시스템과 계약이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

문제는 본인의 마음이다. 절망하고 비관하지 말았으면 한다. 장기전을 버틸 멘탈로 무장해야 한다.

2군 생활을 오래하면 나도 모르게 2군 선수가 돼요. 제가 겪어봐서 잘 알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자기가 어떤 능력의 선수인지 잊게 된다는 거예요.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능력을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 어디선가 자신을 눈여겨 보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2012년이었다. 6년째 2군에 묻혀 있던 유망주가 엄청난 포텐을 터트렸다. 바로 26살의 박병호였다.

당시 그는 어느 매체와 인터뷰에서 2군의 후배들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제 그 당부는 메아리가 됐다. 스스로 마음에 새겨야 할 얘기가 된 것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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