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민기자 MLB리포트]노래하는 엄파이어 빌 바이런과 심판 이야기

조회수 2017. 2. 6. 11:09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메이저리그 심판과 삼진을 노래하던 빌 바이런, 그리고 카우보이 조

야구가 미국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 초창기, 그러니까 18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야구에는 심판(umpire)이 없었습니다.

 당시 야구라는 것이 그렇게 복잡한 규정이 있는 경기도 아니었기에 그저 함께 모여 즐기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845년 뉴욕 월스트릿 인근에 ‘뉴욕 니커보커스’라는 팀을 꾸린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현대 야구의 근간이 되는 성문 규정집을 만들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세세한 규정들이 정리가 되면서 경기 중에 시비가 일기 시작했고, 결국 심판이 등장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초기 심판은 연미복에 모자를 쓰고 3루 근처의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선수들 간에 논쟁이 일어나면 토론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은 정도였습니다.


1859년 브룩클린의 한 야구 경기에서 선수들과 함께 선 연미복 차림의 당시 심판


그 후 야구도 발전하고 심판도 발전하고 이제 역대 MLB에서 활약한 심판은 500명이 넘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심판도 10명이고 영구 결번된 심판도 7명이 있습니다. 1번을 달았던 빌 클렘은 심판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5375경기에서 심판 마스크를 쓰고 푸른 심판제복을 입었습니다. 첫 명예의 전당 심판이기도 합니다. 푸른 심판제복 때문에 야구 심판을 ‘Man In Blue’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MLB에서 5000경기 이상을 뛴 심판이 2명, 4500경기 이상이 5명, 그리고 30년 이상 심판을 본 사람이 13명이나 될 정도로 장수하는 사람이 많은 직종이기도 합니다. 또한, 2대에 걸쳐 심판을 본 부자가 넷이나 되고 에드-폴-브라이언 렁기 집안은 3개가 MLB 심판을 보기도 했습니다.

 MLB가 날로 발전하면서 심판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습니다.

연봉은 경력에 따라 12만 달러에서 30만 달러(약 1억3500만 원~ 3억4000만 원)를 받을 정도이고, 비행기 1등석과 특급호텔을 포함한 숙식비도 따로 주어집니다. 물론, 마이너리그 심판의 대우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하지만 그래서 심판이 꿈인 이들에게 MLB 심판의 자리는 더욱 선망의 대상입니다.

이렇듯 심판의 역사도 길어지고 하다 보니 특이한 인물들도 당연히 나오기 마련입니다.

 작년 6월의 어느 날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의 주심은 조 웨스트였습니다.

 한 번 은퇴했다가 1년 후 복귀한 웨스트는 작년까지 39번의 시즌 동안 푸른 제복을 입고 뛰어 역대 최장 기간 심판 기록을 보유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날 1회말 다저스의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 조금은 독특한, 그러나 웨스트에게는 아직 익숙한 노래가 타자의 등장곡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웨스트 심판은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1987년에 자신이 취입했던 ‘블루 카우보이’라는 앨범에 수록된 곡이었던 것입니다. 조 웨스트는 한 때 컨트리싱어를 꿈꿨습니다. 심판제복의 ‘블루’와 컨트리 뮤직의 한 상징인 ‘카우보이’를 따서 앨범 이름을 ‘블루 카우보이’로 지었습니다. 그날 경기에서 다저스의 타순이 한 바퀴 도는 동안에 ‘카우보이 조’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웨스트의 노래가 6곡 흘러나왔습니다.


삼진 아웃을 노래로 선언했던 특이한 심판 빌 바이런(사진 오른쪽 끝)은 원조 '싱잉 엄파이어'입니다.


 그런데 ‘노래하는 심판(Singing Umpire)’의 원조는 사실 따로 있습니다.

빌 바이런이라는 1910년대에 NL 심판을 맡았던 인물이 바로 ‘노래하는 심판’이라는 애칭의 원조입니다. 1872년 태어난 윌리엄 제레미 ‘로드’ 바이런은 1896년부터 미시간 스테이트리그에서 심판을 시작했습니다. 인터내셔널리그 등 중소리그를 몇 개나 거치면서 경험을 쌓은 바이런은 1913년 4월 드디어 메이저리그 심판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1919년까지 바이런은 1012경기에 심판을 맡았고 1919년에는 빌 클렘 등과 함께 월드시리즈 심판을 맡기도 했습니다.

빌 바이런이 ‘노래하는 심판’으로 불렸던 것은 그가 가수 지망생이거나 노래를 아주 잘 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바이런이 정말 특이한 인물이었던 것이 타자가 삼진을 당하면 마지막 스트라이크 콜을 노래로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노래로 콜을 했는지 녹음이 남아있지 않으니 아쉽지만, 삼진을 당하는 순간 느닷없이 세레나데를 듣는 타자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런데 바이런이 타자나 선수를 무시해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는 아주 낭만적인 인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1917년 시카고의 한 잡지에 실린 이야기인데 그날도 주심을 보던 바이런은 한 타자가 삼진을 당하자 또 노래로 삼진 아웃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이 선수는 몸을 곧추세우고 저지의 먼지를 탁탁 털더니 느닷없이 운동장 밖에 보이던 커다란 굴뚝을 가리켰답니다. 그러더니 “빌, 당신에게 욕을 하거나 흙을 차거나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소. 그렇지만 저 굴뚝이 쓰러져 당신을 덮쳐 벽돌 하나, 하나에 두들겨 맞았으면 좋겠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빌은 화를 내기는커녕 그 선수를 퇴장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더니 “그 선수의 희망 사항이 오히려 위로를 받을만하고 정말 독창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퇴장시키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야구 역사상 쓰러지는 굴뚝으로 심판을 위협한 사건은 전무후무할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지요.

'경(卿) Lord'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꽤 인정받던 심판이던 그가 메이저리그를 떠난 이유도 역시 특이합니다. 배관사업을 구상하던 그는 MLB에서 심판과 사업을 병행할 수 없다고 하자 주저 않고 심판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내셔널리그에서 그에게 연락해 얼마든지 사업과 심판을 병행해도 좋다며 러브콜을 하자 그는 5년 더 심판 생활을 한 후에 사업에 전념하다 195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기사는 minkiza.com, MLB.com, Wikipedia,  등을 참조했습니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