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북한 선수단, 드디어 입을 열다

장훈경 기자 2014. 9. 22.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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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아시안게임 기간 중 북한 선수단 취재를 맡게 됐습니다. 말 한 마디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북한 선수단의 모든 훈련은 비공개를 기본으로 했습니다. 우리나라 입국 이후 공식적인 최대 행사였던 입촌식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병식 선수단장은 "대회 준비는 잘 됐나, 경기 목표는 무엇인가, 선수촌 시설은 어떤가" 등 쏟아지는 취재진의 질문에 "경기를 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 선수들이 준비를 잘해왔다"는 정도로만 답했습니다.

개회식 다음날인 경기 첫 날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첫 경기는 미녀 선수들로 화제를 뿌린 싱크로나이즈 듀엣이었습니다. 입국 당시부터 화제가 된 터라 경기에 참가하지 않는 선수들은 물론 김영훈 체육상 등 간부들까지 응원에 나섰습니다. 북한 대표의 차례가 되자 선수단은 인공기를 들고 일어서서 열렬한 응원을 보냈습니다. 반면, 다른 나라 경기의 경우는 별다른 호응 없이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특히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끝날 즈음에는 모두 자리를 떴지요. "경기 준비는 잘 됐나, 한국 선수들보다 높은 점수를 얻었는데 결과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했지만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말을 섞어서는 안 되는, 접촉해선 안 되는 사람을 본 듯 저를 피하기만 했습니다.

북한 선수단과의 대화는 사실상 불가능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역도 남자 56KG급 경기장에 갔습니다. 북한의 엄윤철이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히는 경기였습니다. 시작부터 긴장감이 넘쳤습니다. 인상에서 133KG을 들어 올린 강력한 경쟁자 중국의 우 징바오는 물론 20살 신예 베트남의 탓 킴 뚜안에게도 밀린 것입니다. 탓 킴 뚜안은 인상에서 134KG을 들어 아시아 기록을 갈아치웠지요. 3위로 시작한 용상에서 짜릿한 드라마가 연출됐습니다. 1위와 6KG의 차이가 있었지만 용상에서 탓 킴 뚜안보다 무려 10KG이나 무거운 170KG을 들어 올렸습니다.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은 물론 용상 세계신기록이 세워진 순간이었습니다.

엄윤철이 용상 경기에 나서기 직전 경기장에 빨간색 옷을 입은 응원단 50여 명이 들어섰습니다. 이들은 한반도기와 '최고다, 엄윤철'이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엄윤철 선수를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냈습니다. 긴장감 넘치던 경기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뀌었습니다. 관중석에 있던 북한 선수단의 임원들도 인공기를 들고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던 엄윤철 선수도 예상하지 못한 응원단의 모습을 들고 역기를 들기 직전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지요. 금메달이 확정됐을 땐 더 많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마치 남북 공동응원이 펼쳐진 듯 경기장 안에는 환호성과 가슴 뭉클함이 퍼졌습니다.

눈에 띈 건 엄윤철 경기 직전 출전한 북한 여자 역도 48KG급 백일화 선수였습니다. 동메달을 딴 선수와 같은 무게를 들었지만 몸무게가 400그램이 더 나가 아쉽게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지요. 역도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경기장 바깥에서 백일화를 처음 봤습니다. 백일화는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습니다. 측은함을 느낀 북측 기자단이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요.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과자를 건네며 기분을 풀어주려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150cm도 안 되는 백일화의 작은 몸짓에 더욱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백일화는 자신의 경기가 끝난 뒤에도 경기장을 떠나지 않고 엄윤철의 경기를 끝까지 지켜봤습니다. 경기장에 환호성이 넘쳐날 땐 직접 일어서서 응원하기도 했지요. 엄윤철이 금메달 수상자로 확정된 순간 백일화의 표정은 자신의 경기는 까맣게 잊은 듯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백일화에게 다가가 소감을 물었습니다. 제가 느낀 경기장에 가득했던 묘한 가슴 뭉클함이 그녀에게도 전달됐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기자의 접근을 의식한 듯 피하면서도 "내가 따지 못한 금메달을 따줘서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백일화의 옆에 있던 석용범 북한 체육과학원 원장도 남측의 열렬한 응원에 대해 "정말 고맙고 기쁜 일이다. 정말 기분이 좋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금메달 수상자 엄윤철은 믹스드 존에서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최고사령관 김정은 원수님 덕에 오늘까지 이렇게 연전연승을 하게 됐다"며 "세계신기록을 세운 데 대해 내 연습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남측의 열렬한 응원에 대해서도 "정말 기쁩니다. 그 분들게 감사드린다"고 답했지요. 기자회견은 취소됐지만 엄윤철의 얼굴 표정에는 남측에 대한 거리낌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경기에서 자신을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의 감정이 느껴졌지요. 저 역시도 경기장을 떠나려는 북측 선수단과 기자단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고 감사의 화답을 받았습니다. 짧지만 처음으로 '대화'를 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 남북 관계는 '대북 전단' 문제로 고위급 접촉은 물론 1주년을 맞은 개성공단에서의 회담도 어려워져 지난해 이산가족 상봉 이후 계속 냉랭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의심과 반목, 대결과 갈등의 흐름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안게임 사흘째, 커다란 화합의 장인 이 곳에서 북한 응원단의 부재에 더욱 아쉬움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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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경 기자 roc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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